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682
한자 李舜臣
영어공식명칭 Yi Sun-sin
이칭/별칭 여해(汝諧),덕암(德巖),충무공(忠武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제장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5년 3월 8일[음력]연표보기 - 이순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2년 - 이순신 무과에서 낙마 사고로 낙방
활동 시기/일시 1576년 - 이순신 식년무과 병과에 급제,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9년 - 이순신 훈련원봉사, 충청병사 군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0년 - 이순신 발포만호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1년 - 이순신 군기경차관 서익의 모함으로 파직
활동 시기/일시 1582년 - 이순신 훈련원봉사에 복직
활동 시기/일시 1583년 - 이순신 함경도 건원보 권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4년 - 이순신 부친 별세로 휴직하고 낙향
활동 시기/일시 1586년 - 이순신 사복시중부, 함경도 조산보 만호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7년연표보기 - 이순신 녹둔도 둔전관 겸직 시 병사 이일의 무고로 파직[1차 백의종군]
활동 시기/일시 1588년 - 이순신 시전부락 전투에서 공을 세움
활동 시기/일시 1589년 - 이순신 정읍현감에 복직
활동 시기/일시 1591년연표보기 - 이순신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2년 5월연표보기 - 이순신 옥포, 합포, 적진포, 사천에서 승전
활동 시기/일시 1592년 7월연표보기 - 이순신 한산도, 안골포에서 승전
활동 시기/일시 1593년 8월연표보기 - 이순신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7년 2월 - 이순신 무고로 하옥
활동 시기/일시 1597년 4월연표보기 - 이순신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2차 백의종군, 모친 사망
활동 시기/일시 1597년 7월 -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
활동 시기/일시 1597년 9월연표보기 - 이순신 벽파진, 명량에서 승전
활동 시기/일시 1598년 11월연표보기 - 이순신 노량에서 승전
몰년 시기/일시 1598년 11월 19일[음력]연표보기 - 이순신 관음포에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598년 12월 - 이순신 우의정 증직
추모 시기/일시 1604년연표보기 - 이순신 좌의정 증직, 덕풍부원군에 봉해짐, 선무일등공신에 녹훈됨
추모 시기/일시 1643년연표보기 - 이순신 충무라는 시호를 받음
추모 시기/일시 1793년 - 이순신 영의정 증직
출생지 건천동 -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1가 31-2번지
거주|이주지 거주지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지도보기
외가|처가 처가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한산도 -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묘소|단소 아산 이충무공묘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8[삼거리 산2-1]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충민사 - 전라남도 여수시 충민사길 52-23[덕충동 산114-12]
사당|배향지 현충사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126[백암리 298-1]지도보기
성격 무관
성별
본관 덕수
대표 관직 삼도수군통제사

[정의]

조선 전기 충청남도 아산에서 성장하였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삼도수군통제사로서 큰 공을 세운 후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무신.

[개설]

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옥포(玉浦)[현재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 앞바다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에서 적선(敵船)을 크게 격퇴하여 왜군의 전의를 상실시켰다. 1597년(선조 30) 왜군의 간계와 조정의 모함으로 백의종군(白衣從軍) 처분을 받았으나 곧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복귀하였고, 13척의 배로 300여 척의 왜군을 격파한 명량대첩(鳴梁大捷)을 이끌어 왜군의 서해 진출을 저지하였다. 마지막 전투였던 11월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왼쪽 가슴에 탄환을 맞아 전사하였다.

[가계]

이순신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호는 덕암(德巖),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이돈수(李敦守)의 12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백록(李百祿)이며, 아버지는 이정(李貞),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이다. 이순신의 형제로는 형 이희신(李羲臣)과 이요신(李堯臣), 동생 이우신(李禹臣)으로 4형제이다. 장인은 아산에서 세거하던 방진(方震)이고, 처는 상주방씨(尙州方氏)이다. 자녀로는 이회(李薈), 이울(李蔚), 이면(李葂) 3남과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이순신은 1545년(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양력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초계변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2세를 전후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충청도 아산으로 이사를 한 후 아산에서 성장하였으며, 아산을 터전으로 삼아서 활동하였다.

이순신은 21세 때 아산에 살던 2세 연하의 상주방씨와 혼인을 한 후 이듬해부터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익히고 28세 때 무과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시험 도중 낙마해 다리를 다치는 부상을 입어 낙방하고 말았다. 이순신이 무과에 합격한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576년(선조 9)에 치렀던 식년무과(式年武科)에서였다. 32세 때 무과에 급제한 이순신은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한 후 22년간 무관 생활을 하였다.

이순신이 북방과 남방을 왕래하면서 관직 생활을 하던 중 아산에 들른 시기는 주로 파직과 휴직, 그리고 백의종군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38세에 발포(鉢浦)[현재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만호(萬戶)로 근무하던 중 파직되어 잠시 아산에 머무르다가 한성부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에 복직된 적이 있었다. 39세 때 함경도 건원보(乾原堡)의 권관 시절 아버지가 사망함으로써 휴직하고 낙향하여 아산에서 3년상을 치렀다. 그 후 42세 때인 1586년(선조 19) 함경도 조산보(造山堡)의 만호로 근무하였으며, 이듬해 두만강 하구에 있던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하고 있을 때 여진족의 습격으로 녹둔도 병영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순신은 백의종군의 처벌을 받았으며, 1588년(선조 21) 2월 시전부락(時錢部落) 전투[여진족 토벌 작전]에서 공을 세운 후 아산에 낙향해 있다가 정읍현감으로 복직하였다.

1591년(선조 24) 이순신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된 후 임진왜란을 맞아 준비된 전력으로 첫 해전인 옥포를 비롯하여 합포(合浦), 적진포(赤珍浦), 사천(泗川), 안골포(安骨浦) 등 수많은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였다. 1593년(선조 26)에는 전라좌수사 겸 초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에서 일본군의 서진(西進)을 막았다.

1597년 왜군의 간계와 조정의 그릇된 판단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된 후 투옥되었다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하였다. 백의종군을 하기 위해 한성에서 초계(草溪)[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로 향하던 중 이순신은 13일간 아산에 머물렀는데, 이때 어머니의 부음(訃音)을 받아서 큰 슬픔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후 명량대첩 등 여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서 1598년(선조 31)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 적을 크게 물리치고는 적탄에 맞아 54세에 전사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순신은 무장이었지만 유학을 겸비한 학자이기도 하였다. 남긴 저술로는 진중에서 기록한 『난중일기(亂中日記)』, 당시의 편지를 수록한 『서간첩(書簡帖)』, 전황 보고서를 수록한 『임진장초(壬辰狀草)』 등이 있으며,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가 1962년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다. 「한산도가(閑山島歌)」 등 이순신이 지은 시가 몇 수 전해지고 있다.

[묘소]

이순신의 시신은 1598년 11월 19일 순국 후 고금도(古今島)를 거쳐 그해 12월 중순 아산 본가에 도착하여 3개월간 장례를 치렀다. 그 후 1599년(선조 32) 2월 11일 아산 음봉면 금성산(錦城山) 자락에 안치되었다가, 1614년(광해군 6)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어라산(於羅山)의 자리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훈과 추모]

이순신이 순국하자 조정에서는 1598년 12월에 우의정을 증직(贈職)하였으며, 1604년(선조 37)에는 좌의정을 증직하고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의 작호(爵號)를 수여하였다. 1604년 10월에는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어 후손들은 대대로 공신의 후손으로서 대우를 받게 되었다. 1643년(인조 21)에는 ‘충무’ 시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정조 17)에는 영의정이 증직되었다. 이순신의 사후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충민사(忠愍祠)를 시작으로 많은 사당이 세워졌으며, 아산시에 있는 현충사(顯忠祠)이순신을 제사 지내는 사당 중 가장 큰 규모로 추모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12.07 오류 수정 활동사항 오류 수정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