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민공계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401
한자 忠民公啓草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제장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592년 4월 15일연표보기~1594년 4월 20일연표보기 - 『충민공계초』 작성
소장처 국립해양박물관 - 부산광역시 영도구 해양로301번길 45[동삼동 1156]
성격 문헌
저자 이순신
편자 미상
권책 1책 73장
규격 23.9㎝[가로]|41.2㎝[세로]

[정의]

충청남도 아산에서 활동한 이순신임진왜란 당시 국왕과 세자에게 올린 계문과 달문을 작성일자별로 분류하여 등서한 장계 등록류의 편찬물.

[개설]

『충민공계초(忠民公啓草)』에 실려 있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1545~1598]이 작성한 공문서인 장계(狀啓)의 전사본(傳寫本)이다. 장계란 조선시대 관찰사(觀察使)·병사(兵使)·수사(水使) 등이 왕에게 보고하거나 청하는 문서를 말한다. 장계는 승정원에서 열어보고 담당 승지가 이를 왕에게 올려서 왕의 재가를 받은 다음, 계하인(啓下印)을 찍고 그 장계의 내용과 관계 있는 관서에 하달된다. 전사본은 공문서인 계본등록(啓本謄錄)을 전사하는 것인데, 관부·사가나 문중에서 보관하는 것이 보통이다.

『충민공계초』는 국립해양박물관이 2013년 4월 공개 구입하여 공개함으로써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충민공계초』가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을 때 덕수이씨(德水李氏) 충무공파(忠武公派) 종가에서 보관하다가 분실된 것이라는 종가 측의 주장이 있었다. 이에 소유권 문제로 법정 공방을 벌이다가 결국 국립해양박물관이 정당한 절차에 따라 구입한 것으로 판명되어 현재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있는 국립해양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저자]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작성한 공문서들을 분류하여 등서한 편찬물로 저자는 이순신이다.

[형태/서지]

『충민공계초』는 오른쪽에 「임진병란사(壬辰兵亂事)」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편자는 미상이고 저자는 이순신이며 필사본 형태이다. 책의 말미에는 "강희원년임인삼월염일서종(康熙元年壬寅三月念日書終)"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1662년(현종 3) 3월 20일에 필사를 마치다."라는 뜻이다.

크기는 가로 23.9㎝, 세로 41.2㎝이며 1책 73장으로 되어 있다. 재질은 닥나무껍질로 만든 저지(楮紙)이며, 오침 안정법(五針安定法)[구멍을 5개 뚫어 철하는 방법]으로 장정되어 있다. 『충민공계초』에는 총 68편의 장계가 해서와 초서의 중간격인 행서로 쓰여 있다. 장계는 1592년(선조 25) 4월 15일부터 1594년(선조 27) 4월 20일까지 작성된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592년에 작성된 장계가 14편이고, 1593년에 작성된 것이 29편이며, 1594년에 작성된 장계가 22편이다. 나머지 3편은 작성일자가 누락되어 있다. 세부 장계 내용은 분량이 많으므로 2017년 민속원에서 펴낸 『충민공계초』 15~17쪽 ‘충민공계초에 수록되어 있는 장계와 부록의 목록’를 참고하면 된다.

[구성/내용]

『충민공계초』에서 본문의 기재 방식은 일률적이지 않다. 일반적으로 장계를 등서할 때 장계의 수신처가 승정원임을 알리기 위해 ‘승정원 개탁(承政院開坼)’이라고 기재하는데, 『충민공계초』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장계의 작성일자는 명나라의 연호인 ‘만력(萬曆)’을 이용하여 ‘연호간지월일(年號干支月日)’ 순서로 기재되어 있다. 문서 발급자의 기재 방식을 보면 문서마다 발급자의 직함 성명이 모두 기재되어 있는 경우는 첫 장계뿐이며,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신 이순신’으로 기재되어 있다.

『충민공계초』 말미에는 전라좌수영 지역에 있는 이순신 관련 비나 유적에 대한 3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2편은 이항복(李恒福)이 작성한 「이통제비명(李統制碑銘)」과 「고통제사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이고, 나머지 1편은 박승종(朴承宗)이 작성한 「충민사기(忠愍祠記)」이다.

[의의와 평가]

『충민공계초』는 언뜻 보아 이순신의 장계로 보기 어려운 표제이다. 이순신의 시호가 충무공이고 널리 알려진 ‘충민공’의 대표적 인물이 임경업(林慶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충민공계초’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충무공’ 시호를 받기 전에 보편적으로 ‘충민공’이라는 인식이 저변에 확산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예컨대 1600년(선조 33) 이순신 관련 사액(賜額)[임금이 사당(祠堂), 서원(書院), 누문(樓門)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 사당 1호가 충민사(忠愍祠)이고, 남해 충렬사(忠烈祠)에는 충무공비가 세워지기 전에 충민공비가 있었다는 것이 근거이다.

『충민공계초』가 필사된 시점은 이순신에게 ‘충무공’ 시호(諡號)가 내려진 지 19년이 되던 해이다. 국왕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왕정시대에 왕이 하사한 시호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행위였을 것이다.

한편 『충민공계초』 말미에 있는 3편의 글은 모두 충민사와 관련된 글이거나 충민사를 언급하고 있다. 추측한다면 『충민공계초』의 편찬자는 국왕이 하사한 ‘충무공’이라는 시호보다 백성들이 부여한 명칭인 ‘충민공’을 의도적으로 사용했으며, 이에 대한 자신의 근거로 충민사와 관련된 글 3편을 모아 함께 수록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순신 장계의 이본(異本)은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충민공계초』와 『충무공임진장계』, 현충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임진장초(壬辰狀草)』,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충무공계초』,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충무공전서』, 그리고 성균관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충무공계초』가 있다. 『충민공계초』를 이본들과 비교해 보면, 『충민공계초』이순신 장계의 이본류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조선 중기 공문서의 원본에 가까운 계본이다. 아울러 『임진장초』에 없는 12편의 장계가 『충민공계초』『이충무공전서』에만 수록되어 있는데, 『이충무공전서』에서 이두[吏讀]식 표현이 누락된 장계를 『충민공계초』에서 원본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국보 제76호로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가 지정되어 있지만, 『충민공계초』는 고문서학적으로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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