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E010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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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정현 |
1361년 2차 홍건적의 난으로 인한 공민왕의 안동 몽진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자 고장의 자랑거리로 남아 있다.
특히 가송리와 주변 지역에서는 공민왕과 부인 그리고 두 딸이 신격으로 모셔지고 있어 이 지역 사람들의 공민왕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신앙적 신념으로 전화된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을 통해 검토해 보면 공민왕이 실제 이곳에 왔던가는 불확실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신격으로까지 모셔지고 있는 상황은 참으로 많은 부분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가송리의 이웃마을인 산성마을에는 공민왕당이 있고, 북곡에는 공민왕의 왕대부인을 모신 부인당이 있으며 신남동 구티미에는 공민왕의 둘째 딸을 모신 애기당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북곡과 가송 모두에서 부인과 공주가 애매하게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송에서는 부인당이라고 하고 북곡에서는 공주당이라고 하는데, 이는 부인과 공주라는 개념보다는 공민왕 가계의 여성 신격을 모신다는 점이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설에 따르면, 공민왕이 아들을 두지 못한 불운한 왕이었고, 그러한 회한을 부인과 공주도 역시 함께 가지고 있었기에 신격이 되었다고 전한다.
가송리의 부인당(일명 공주당)은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고 하며, 그 옆에 있는 산신각은 1992년 안동시내에 살고 있는 남영주라는 분이 부인당과 금화섭 씨 개인당의 영험을 얻어 감사의 뜻으로 마을에 기증하는 식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가송리에서는 본래 산신각이 없이 마을굿을 행할 때 산신을 위한 제상만 하나 더 차려서 제사를 모시다가 산신각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약 3.3㎡ 남짓한 기와건물인 부인당 안에는 갖가지 옷가지가 화려하게 걸려 있고 서낭대도 보관되어 있다. 부인당 안의 옷은 여신을 위한 폐백이기도 하고 서낭대를 입히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당에서 서쪽으로 약 60m 정도 떨어진 곳에 당나무가 있는데, 이곳은 부인당과는 별도로 거리제를 지내는 곳이다.
부인당의 상량문에는 “무진이월초사일갑오오시입주상량(戊辰二月初四日甲午午時立柱上樑)”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상량문의 옆쪽 면에는 “공유성황중건사우하재불멸이매원둔민안기업염자재자자금위시일동지주유신기택하복불진호표은적사모기성숙불차앙영구안녕(恭惟城隍重建祠宇何灾不滅魑魅遠遁民安其業念玆在玆自今爲始一洞之主有新其澤何福不臻虎豹隱跡士慕其誠孰不次仰永久安寧)”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상량문 내용으로 볼 때 현재의 부인당은 무진년에 중수한 것으로 보이는데, 역사적으로 무진년은 1568년, 1628년, 1688년, 1748년, 1808년, 1868년, 1928년, 1988년 등이다. 특별한 연호 등을 사용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1928년일 가능성이 높지만, 상량문 옆에 기록된 사연의 문맥을 보면 이보다 훨씬 더 오래 전일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도깨비를 뜻하는 ‘이매’ 등의 표현은 근래에 잘 쓰지 않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부인당은 정월 14일 이전에 금줄과 황토가 뿌려지면 여자들의 출입이 완전히 금지된다. 평상시에도 여자들은 이곳 출입을 자제한다. 부인당의 경우 2~3년마다 서낭제를 지낼 때 친정에 간다고 하여 성황기를 앞세우고 산성마을에 있는 공민왕당을 방문했으나, 이러한 차례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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