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C03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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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미영 |
2003년 12월 어느 날, 김창현은 김보현·김두현과 담소를 나누다 마을 뒤편에 자리한 참나무 숲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흉측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그러면서 외부 사람들이 와서 보면 마을 체면에 이만저만한 손상이 아니라는 걱정을 동시에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김보현이 김창현을 찾아와 1천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형님! 이걸 갖고 참나무숲을 좀 어떻게 해보시지요.” 하고는 돌아갔다.
그 날부터 김창현은 ‘1천만 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며칠을 그렇게 보내다가 이번에는 김창현이 김보현을 찾아갔는데, 마침 그 자리에 김두현이 있었다. 이에 김창현은 1천만 원짜리 수표를 내놓으면서 “내 아무리 생각해 봐도, 1천만 원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네.”라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두현이, “아이고 형님! 내 그러지 않아도 찾아뵈려고 했는데, 저도 1천5백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하면서, 이참에 전국에 있는 후손들에게 모금운동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도 내놓았다. 귀가 솔깃하는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퇴락해 가는 참나무 숲을 조성한다는 명목으로 모금운동을 한다면 큰 호응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생겼다. 이때 김창현의 머리를 번뜻 스쳐간 것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조상들의 얼굴이었다. 즉 광복기념공원을 조성하여 조상들의 얼을 기린다면 모금운동을 위한 명분이 충분히 설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후손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실시하여 2005년 무렵 4천만 원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념공원을 조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대충 계산을 해봐도 3억 원 가량의 자금이 필요했으나,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저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김창현은 며칠 밤을 새우며 「현충시설 건립사업계획서」를 작성하였다. 그때가 2006년이었다. 그리고 서류를 들고 도청과 시청을 수차례 방문하여 지원을 요청했으나, 보훈청으로 가라는 답만 되돌아왔다. 하는 수 없이 보훈청 문을 두드렸는데, 생각지도 않게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김창현은 집으로 돌아와서 마을 사람들을 비롯하여 모금운동에 참여한 후손들에게 손수 편지를 써서 결과를 알려주었다. 그러자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격려의 회신이 왔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보훈청으로부터 9천만 원의 국고지원이 결정되었다는 통보가 왔고, 이어 도청과 시청에서도 9천만 원의 지원을 해주겠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로써 2억 7천만 원의 지원금과 앞서 모금해 둔 4천만 원까지 모두 3억 1천만 원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후 사업계획서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총 공사비는 5억 7천만 원으로 늘어나 있었다. 김창현 옹은 이번에도 하는 수 없이 후손들에게 호소문을 보냈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많게는 3천만 원, 적게는 5만 원까지의 성금이 속속 도착하였다. 모금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약 240명이었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5억 7천만 원을 모을 수 있었다.
2008년 10월 11일, 240명의 오미마을 후손들의 정성어린 땀의 결실을 공개하는 이른바 오미광복기념공원 준공식이 개최되었다.
당초 200명 정도가 참석하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8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성금을 내준 오미 사람들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정성껏 모금을 하여 조상의 얼을 기리는 광복공원을 거뜬히 세웠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웃마을 사람들까지도 모여들었다. 덕분에 10월 11일 오미마을은 그야말로 흥겨운 잔칫날이 되었다. 퇴락해 가는 참나무 숲이 마을을 아끼고 사랑하는 오미마을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 덕분에 조상의 얼을 기리면서 동시에 안동의 명물로 거듭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이날 오미마을에는 밤늦도록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흥겨운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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