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C03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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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미영 |
김지섭(金祉燮)은 1884년 오미리에서 김숭조의 11세손으로 태어나 8세에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재주가 뛰어나 천재라는 말을 듣곤 하였다.
24세 되던 해인 1907년 3월에 보통학교 교원시험에 합격하고, 같은 해 5월 경상북도 상주보통학교 교원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에 사직하였다.
1909년 서울로 올라가서 광화신숙 일어전문과에서 일본어를 불과 1개월 만에 수료하고는 재판소 통역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후 김지섭은 전주와 금산재판소 서기로 근무하면서 일제의 만행과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1910년 금산재판소에 재직 당시 한일합방 소식을 전해 듣고 비탄에 잠겨 있을 때, 금산군수 홍범식이 국치의 통분을 이기지 못해 자결하자 앞장서서 장례를 치르고는 고향 오미리로 돌아왔다.
1915년 족형(族兄) 김응섭이 운영하던 법률사무소 서기가 되어 상주출장소에 근무하였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고 이듬해 상해로 망명하였다. 이후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1922년 여름 상해에서 의열단에 가맹하였다. 이듬해 2월에는 폭탄 36개를 중국 상해에서 천진으로 수송한 뒤 서울로 반입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3월 15일 조선총독부와 경찰서, 재판소,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등을 파괴하려다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또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같은 해 다시 조선으로 밀입국하고는, 12월 23일에 당시 조선총독부 판사직에 있던 백윤화의 집을 찾아가 군자금 5만 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앞서 9월 1일 일본 관동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 정부에서 이를 수습하기 위해 조선족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고의적으로 유포하여 일본인들이 죽창 등 온갖 흉기를 갖고 무고한 조선족들을 학살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지섭은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는 윤자영, 김옥 등과 함께 폭탄 3개를 지참하여 일본에 밀입국하기로 하였다
12월 20일, 김지섭은 동료 두 사람과 함께 일본 선원의 도움으로 상해에 정박 중인 석탄이동선 덴조산환[天城山丸]의 창고에 숨어들어 평양을 거쳐 12월 30일 일본 규슈[九州]의 후쿠오카[福岡]에 도착하였다. 그야말로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 지낸 지 열흘 만이었다. 그리고 1월 3일 오후, 도쿄행 열차에 올랐다. 당시 김지섭의 머릿속에는 천황을 비롯하여 일본 정부 고관들이 모인 자리에 폭탄을 던져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살당한 동포들의 원혼을 달래 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윽고 1월 5일 새벽 6시, 김지섭 일행은 도쿄역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날 개최하기로 한 제국의회가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폭탄을 지닌 채 도쿄거리를 활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에 김지섭은 일본 왕궁을 폭파할 생각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참배객들 틈에 끼여 배회하던 중 어둠이 찾아들 무렵 김지섭은 왕궁으로 통하는 니쥬바시[二重橋]로 뛰어들었다. 일본 근위대가 길을 막자, “나는 너희 나라 천황에게 볼 일이 있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라고 외치고는, 폭탄 2개를 연이어 던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도화선의 고장으로 폭탄 2개가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머지 폭탄 1개를 가슴에서 꺼내 들고 다시 던지려고 하는 순간 김지섭은 근위대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감옥에 들어간 김지섭은 온갖 취조와 고문을 받으면서 수개월에 걸친 공판 끝에 1924년 11월 6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김지섭은 “이는 죽음과 다를 바 없으니 무죄석방을 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사형에 처하라.”고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27년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이듬해 1928년 2월 20일 김지섭은 차디찬 감방에서 향년 45세로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