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C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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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미영 |
김응섭(金應燮)은 1878년에 김경조의 11세손으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한학을 배우고 1907년 한성법관양성소를 졸업한 후 함흥재판소 검사를 역임했으며, 1909년부터는 영변구재판소 판사로 재임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이듬해 평양지방법원 검사로 강제 임명되었으나 두 달 만에 사직하고, 같은 해 7월 평양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가 대구로 사무소를 옮긴 다음 항일투사들의 변호에 평생을 몸담았다.
3·1만세운동이 천지를 뒤흔들던 1919년 4월, 대구를 무대로 군권회복단이 결성되었다. 당시 군권회복단은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후 김응섭과 남형우에게 독립자금 5천 원을 주어 상해임시정부로 파견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김응섭은 그때부터 망명생활에 들어가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독립운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931년 54세 되던 해에 장춘(長春)에서 체포되었다. 한족노동당의 당수를 지낸 김응섭은 60일간의 고된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고향 오미리에서 소식을 전해들은 장남 김헌재(金憲在)가 길림성까지 한숨에 달려와 백방으로 노력한 덕분에 김응섭은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대구로 호송되었는데, 당시 만주 장춘의 형무소에서 물고문을 당하면서 지은 시가 전한다.
반망중국한응심(半亡中國恨應深: 반쯤 망한 중국의 한은 당연히 깊어)
사아동정루불금(使我同情淚不禁: 나의 동정의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네)
비흡두여청랭수(鼻吸斗餘淸冷水: 한 말이 넘는 찬물을 코로 먹이니)
혼신어화와신음(渾身魚化臥呻吟: 온몸은 물고기 되어 누워서 신음한다)
이후 김응섭은 노환과 맹장염으로 오미리 자택에서 수년간 투병생활을 한 끝에 완쾌되어 강원도 철원에서 농장을 경영하면서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농장에서 얻어지는 수익금 전부를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에게 보내고, 전국 각지를 돌면서 지하운동을 펼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군자금 모금에 힘을 기울였다.
1948년 김응섭은 건국운동의 일환으로 전국유교연맹대표가 되어 김구 선생을 포함한 80여명과 함께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역설하였다. 그럼에도 남쪽에서 단독 정부가 세워지자 국토 양분과 민족 분쟁에 크게 낙심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후 6·25전쟁이 일어나 같은 해 12월 오미리로 돌아왔으나, 1957년 남북분단의 한을 가슴에 품은 채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