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C02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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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미영 |
오미리의 동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자정에 지낸다.
서낭당이 세 곳이기 때문에 제관 역시 세 명을 선출하는데, 이를 ‘삼제관’이라고 한다. 기혼 남성 가운데 상주가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관이 될 수 있다. 특별한 절차가 있는 것은 아니고, 마을 어른들이 상의하여 결정하는 편이다. 신분의 구별이 뚜렷했던 시절에는 주로 아랫사람들이 제관을 맡았으며, 풍산김씨들이 제관을 맡기 시작한 것은 대략 10년 전부터라고 한다. 여느 동성마을과 마찬가지로 유교식 제례가 아닌 의례는 타성들, 곧 아랫사람들이 수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관념이 강했기 때문이다.
제관 선출은 보름이나 열흘 전쯤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최근에는 이틀 전에 뽑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는 예전에 비해 동제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사라진 탓도 있지만, 제관에 합당한 장년층들이 마을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인구 유출이 많은 까닭도 있다. 또한 제관으로 선출되면 그날부터 재계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부부 합방이나 외출 등에 제약을 받기 때문에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생업에도 지장이 적지 않다. 이런 이유로 누구나 제관이 되기를 꺼려하므로, 제관 선출을 늦추어서 재계에 대한 부담을 덜어 주려는 것이다. 그야말로 동제를 전승하기 위해 나름대로 마련한 지혜로운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제관 선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동제를 쉬이 포기하지 못하는 까닭을 물었더니 몇몇 어른신께서, “혹시 동티가 나서 마을에 탈이 생길지도 모를까 봐…….”라고 대답해 주었다. 인터넷을 이용하여 이메일을 주고받는 노인도 적지 않은 오미리이지만, 동제를 중단하면 동티가 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동제 이틀 전에 제관을 선출하더라도 실제 재계에 들어가는 날은 당일뿐이다. 즉 정월 열나흗날 3명의 제관은 풍산읍에 있는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장거리를 봐와서 제수를 마련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 역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어도 대부분 묵인하는 편이다. 제수 마련은 도가(都家)에서 담당한다. 따라서 도가의 주인 역시 제관들과 마찬가지로 당일 재계에 들어간다.
제수 장보기에는 제물의 재료뿐만 아니라 제기(祭器)도 포함된다. 여느 마을과 달리 오미리에서는 한 번 쓴 제기는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해 두고 있기 때문에 해마다 새로 구입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릇을 비롯하여 밥솥과 떡시루 등과 같이 제물을 마련하는 데에 사용되는 각종 조리기구도 해당된다. 그리고 사용한 제기와 도구는 제물 담당을 한 도가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오미리에는 동답(洞畓)이 없기 때문에 해마다 추렴을 해서 소요 경비를 충당한다. 지금은 각 집마다 의무적으로 일정 금액을 거두는 지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정월 열흘 무렵에 풍물을 치면서 집집마다 걸립을 다녔다고 한다.
동제를 지낼 때에는 서낭당마다 한지를 걸어둔다. 한지는 소지를 올릴 때 사용되기도 하지만 제물을 차릴 때도 유용하게 쓰이므로 비교적 넉넉하게 준비해 둔다. 그리고 쓰고 남은 한지는 서낭당 금줄이나 나뭇가지에 걸어둔다. 아들 낳기를 바라는 아녀자들이 동제에 사용된 종짓불을 앞 다투어 훔쳐 가듯, 한지 역시 남성들의 주된 표적이 되었는데, 동제에 쓰인 한지를 가져가서 글을 쓰면 장차 명필가가 될 만큼 글이 잘 써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한지를 아들이나 손자 책상머리에 걸어두면 공부를 잘한다고 하여 걷어가는 경우도 있단다.
아울러 제물로 차려진 떡을 먹으면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서 음복으로 나오는 떡 외에도 도가의 부엌에까지 들어가서 시루떡을 훔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거의 사라진 광경이다. 그런데 오미리에서는 시루떡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제수 장보기에서는 떡시루를 세 개 구입하지만 정작 떡을 찔 때에는 두 개만을 사용하는데, 한 개의 시루에서 찌는 떡이 저절로 갈라지기 때문이란다. 즉 한 개의 시루는 남편인 서낭신에게 올리는 시루떡을 찌고, 나머지 한 개에서 본처와 소실에게 올릴 떡을 찌는데, 칼로 자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갈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질투와 시기로 인해 자칫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는 본처와 소실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나온 이야기처럼도 들렸다.
세 곳의 서낭당에서 제사를 모두 마치면 도가에 모여 음복을 한다. 이때 연령과 상관없이 3명의 제관들이 상석을 차지하고, 음복 역시 제관들이 먼저 하고 나서 마을 사람들이 하는 것이 원칙이다. 특히 제관들이 음복을 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방으로 들어가서는 제관들을 향해 “밤새 동제 지내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혹은 “수고들 많았네.” 하는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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