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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김연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C010204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미영

김연조(金延祖)는 1585년 영주에서 부친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 5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8세 때 스스로 글을 지어 형제들과 친구들 앞에서 읊기도 하였다. 이런 연유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도 했는데, 다음은 김연조가 17세 되던 무렵 아버지 김대현한테서 온 편지글 내용이다.

스승에게 ‘中(중)’자를 써 달라고 하여 거처하는 방 벽에 붙여 놓고 아침저녁으로 체험하고 연구해야 한다. 또 스승에게 ‘心(심)’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능히 잘 가질 수 있으며, ‘性(성)’이란 무슨 형체이며 어떻게 해야 능히 잘 길러낼 수 있습니까?”하고 여쭤 봐야 한다. 너는 아직 어리고 배우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스승께서 잘 가르친다 하더라도 반드시 알아듣지 못한 바가 많을 것이다. 오늘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내일 또 다시 묻기를 지루하게 여기지 말고 반드시 분명히 이해한 다음에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한편, 1601년 아버지가 산음현감으로 부임할 때 존심(存心)·양성(養性)·지경(持敬)·주정(主靜)이라는 여덟 글자를 보이면서 이것이 ‘입도적결(入道的訣)’이라고 한 사실이 있었는데, 이것은 훗날 「성학도」라는 이름으로 그려져 『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에 담겼다.

이렇듯 아버지로부터 깊은 애정과 관심을 받아온 만큼 김연조의 효심도 유별났다. 1602년 김대현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김연조는 한걸음에 달려가서 아버지의 대변을 거두어 맛을 보면서 증세를 가늠할 정도로 지극한 정성을 보였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큰 충격에 휩싸여 핏기 없는 얼굴로 장례를 치르고는 급기야 자리에 몸져누워 목숨을 잃을 상황까지 갔다가 간신히 되살아나기도 하였다.

자리에서 겨우 일어난 김연조는 동생들을 향해 “지난 날 아버님께서 큰 포부를 지니시고 한양에서 잠시 벼슬하고 계실 때 온갖 고생을 겪으셨다. 우리들이 훗날 봉록(俸祿)을 받는다 할지라도 차마 어떻게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을 것인가?” 하면서 며칠 동안을 눈물로 보냈다고 한다. 이후 1613년 29세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한림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못했다. 사실 김연조는 과거를 치르고 나서 아랫입술에 자그마한 종기가 생겨 쑥뜸을 했는데, 그게 잘못되었는지 온갖 치료를 해도 낫지 않고 증세가 악화될 뿐이었다.

이에 스스로 가망이 없음을 알고는 형님들을 향해, “내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늙으신 어머니를 잘 봉양하기 어려움을 이유로 글공부에 더욱 힘써서 대과까지 했고, 또 한 글자를 읽고 구절을 외울 때마다 훗날 꼭 어머니 봉양을 잘해 보려고 애를 썼건만 지금 병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나의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김연조가 숨을 거두기 며칠 전, 노모가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김연조는 어머니 무릎 밑에 고개를 조아리며 “불초한 자식이 불행히도 이렇게 되었으니 불효가 극심합니다. 너무 애통해 하지 마시고 이 자식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소서.” 하고는 말문을 열지 못하였다. 이어 동생들이 울면서 매달리자 “너희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적선(積善)이다.”라고 하면서 초연함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며칠 뒤 숨을 거둔 김연조는 추원사에 부친 김대현을 비롯하여 형제들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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