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A02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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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임재해 |
사람들은 하회마을이 풍산류씨 집성촌이기에 당연히 종가도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짐작과 다르게 하회마을에는 두 종택(宗宅)이 있다. 바로 겸암파와 서애파의 종택인 양진당과 충효당이 한 마을에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겸암과 서애는 입암 류중영(柳仲郢, 1515∼1573)의 장남과 차남으로, 형제가 한 마을에서 종가를 이룬 것이다.
보물 제306호로 지정되어 있는 양진당은 풍산류씨 입향시조인 전서공이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자, 하회에 터를 잡을 당시 처음 지은 사랑대청 건물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건물이다.
13세기 말에 지어졌다고 하니 하회에서 가장 오랜 건축물이기도 한 양진당은, 종택답게 명당을 차지하여 하회에서는 보기 드물게 정남향을 취하고 있다.
양진당은 4,958.7m²의 대지 위에 대종택다운 위치와 규모를 자랑하며 조선조 영남 사림의 대표적인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는 양진당은 임진왜란 때 지방 도적 떼의 방화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곧 중수되었으며, 따라서 중수된 부분은 1600년대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양진당에는 현재 13대 종부가 거주하고 있다.
사랑채의 당호 ‘양진당’은 겸암의 6세손 류영(柳泳, 1687~1761)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류영은 양진당을 크게 중수했고, 겸암정사와 상봉정을 중수하기도 했다.
최근에 양진당을 수리하면서 종도리 아랫부분에서 1576년 입암 류중영이 양진당을 수리할 당시에 쓴 중수기를 발견하였다.
중수기에는 당시 집을 수리해야 했던 사정과 수리에 참여했던 목수와 노비의 이름까지 밝히고 있어 당시의 건축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보물 제414호로 지정된 서애 종택 충효당의 전면은 화천과 원지산의 경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서쪽을 향하고 있다. 소백산맥의 줄기인 화산의 지맥(地脈)을 따라 서향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충효당은 원래 단촐하였으나, 서애의 문하생들과 증손인 류의하(柳宜河)가 서애의 유덕을 기리는 뜻에서 확장, 증축하였다고 전한다.
충효당 사랑채 주변의 거리마당은 물론 대문채 밖의 마당까지도 여러 가지 수목들이 다양하게 자라고, 꽃밭에는 가지각색의 꽃이 잘 가꾸어져 있어 경관이 무척 아름답다. 현재 서애의 14대 종손 내외가 안채를 지키고 있다.
충효당의 전서체(篆書體)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로 알려진 우의정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친필이다. 충효당 뒤쪽으로 불천위 사당과 유물전시관인 영모각(永慕閣)이 있다.
불천위 사당 앞에는 일명 ‘만지송(萬枝松)’이 가지를 뻗고 있어 구경할 만하다. 영모각에는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을 비롯한 각종 문서와 유물들이 보관·전시되고 있다.
양진당과 충효당처럼 한 마을에 큰 종가와 작은 종가가 마주하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도 하회마을의 양진당과 충효당은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의 우애를 상징하며 하회마을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을 대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