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A01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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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임재해 |
하회마을은 고려 후기 이후 지금까지 풍산류씨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하회가 전국 각지에 양반마을로 알려지면서 나아가 명문세가의 마을로, 또는 유교문화의 전형적 마을로 주목을 받게 된 결정적 계기는 겸암과 서애로부터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겸암과 서애에 얽힌 전설도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데, 전설 속에서 겸암은 한결같이 이인(異人)으로 묘사되어 서애보다 탁월한 인물로 이야기된다. 이인이란 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을 말한다. 이야기 속에서 겸암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조짐도 먼저 알아채는 등 여러 가지 기이한 행적을 남기고 있다.
겸암의 이인성이 드러나는 이야기는 다양한데, 바둑으로 서애에게 병법을 가르쳤으며, 또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국가적 임무를 맡은 서애의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내용도 있다. 이여송이 평양에 도착하기 전 서애에게 평양지도를 미리 준비해 주어 이여송을 감탄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겸암은 앞날을 내다보고 서애를 위기에서 구하기도 한다. 일본 자객이 서애를 죽이러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측하고 서애를 위험에서 구해 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몇날 며칠이 걸려서 다녀온다는 한양을 하루 만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축지법을 쓸 줄 아는 도인이었다는 것이다.
겸암 하면 빠트릴 수 없는 이야기 중 하나가 효행과 관련한 내용이다. 겸암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3년 만에 병이 나서 점차 악화되자 집사람들에게 “내가 아침저녁으로 어머님께 문안인사를 못 드린 지 오래이므로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터이니 물으시면 병세가 점점 회복되어 간다고 여쭈라.”며 당부할 정도로 효행이 지극했다고 한다. 서애를 충(忠)의 상징으로 삼는다면 상대적으로 겸암을 효(孝)의 상징으로 삼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근거를 두고 이기설이나 사칠논변(四七論辯)의 변증을 시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겸암의 학문적 깊이도 서애 못지않았다. 저서로 『겸암집』과 『오산지(吳山志)』 외에 여러 권의 책을 남겼다. 겸암은 1601년(선조 34) 3월 5일 향년 63세로 별세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서애는 겸암의 아우로 임진왜란의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선조의 명신이자 퇴계의 학통을 이은 학자이다. 1592년(선조 25) 4월 일본이 침입하자 조정에서는 좌의정인 서애에게 병조판서를 겸임시키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하였다. 명실공이 전시행정의 총수가 된 것이다.
왜군이 신무기를 앞세우고 공격해 오자 아무런 대책이 없던 아군은 파죽지세로 밀렸고, 결국 조정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성의 함락이 목전에 이르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길에 오르는데, 그 향방이 분분하자 서애는 “만일에 임금이 한 걸음이라도 우리 땅을 떠나게 되면 조선은 잃고 만다.”며 의주(義州)로 가서 끝까지 본토를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선조가 이에 따르도록 하였다.
피난 중에도 당쟁이 끊이지 않아 당시 영의정이던 이산해(李山海)가 탄핵을 당하고 그 후임으로 서애가 영의정으로 오르나, 다시 반대 당의 배척을 받아 당일 저녁에 해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신임을 받아 계속 동행하며, 명나라의 원군을 맞이하여 왜군 퇴치작전을 세우는 데 이바지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우고 다시 평안도 도체찰사와 호서·호남·영남의 3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었다.
한양이 수복되어 환도한 뒤에는 영의정에 오른 동시에 경기·평안·황해·함경도의 4도 도체찰사를 겸임하게 된다. 이후 서애는 새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훈련을 강화하고 연병규식(練兵規式)을 반포했으며, 조총 등의 무기를 연구하여 만들게 하는 한편, 남한산성을 비롯한 여러 산성을 수축한다. 또한 조령(鳥嶺)에 둔전(屯田)을 두고 충주 방어를 엄중하게 하여 왜적의 침입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기 한 달 전에 서애는 북인의 모함을 받아 정계에서 물러나 57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온다.
서애는 스스로 임종 시기를 예견하고 서책과 주변을 정리한 뒤에 자녀들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주목을 끈다. 첫째, 나라에서 베푸는 장례를 사양할 것이며, 둘째, 신도비(神道碑) 등을 세우기 위해 남에게 비명(碑銘) 등을 청탁하지 말 것이며, 묘소를 치장하지 말 것을 특별히 당부했다. 그리고 평소에 자손들이 학문에 정진하고 충효를 행할 것을 권면하는 다음 시를 남겼다.
숲속의 한 마리 새 쉬지 않고 우는데
문 밖에는 나무 베는 소리 정정하게 들리는구나
한가닥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 또한 우연이거늘
다만 평생 동안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럽구나
권하노니 자손들은 반드시 삼갈지니
충효 밖의 마땅한 사업은 없는 바이다.
서애는 1607년(선조 40) 5월 6일 향년 66세로 별세하였고, 이후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병산서원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퇴계의 학통을 이어 받은 겸암과 서애 형제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또한 겸암과 서애를 기점으로 하회의 류씨 가문은 번성하여 인물이 끊이지 않았다. 성리학의 전통과 유가적 의례 양식이 최근까지도 잘 전승되고, 문적(文蹟)과 유물·유적·고가옥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 역시 겸암과 서애 형제의 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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