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A010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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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재해 |
서애 류성룡은 겸암 류운룡의 아우로서 임진왜란의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선조 때의 명신이자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학자이다. 21세에 형 겸암과 도산서당을 찾아가 퇴계의 가르침을 받았고, 23세에 사마시(司馬試)의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했으며, 성균관에 입학하던 25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서애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고향의 전원과 독서를 즐겨 여러 차례 사직하여 물러났다. 43세 때도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이듬해에 물러나 부용대 기슭에 옥연정사를 짓고 독서하며 제자들을 길렀다.
3년 뒤 서애는 다시 형조판서로 제수되어 조정에 나갔다. 그리고 우의정을 거쳐 50세가 되던 해 좌의정에 올랐는데, 일본의 침략 의도에 맞서 진관법(鎭管法)을 건의하는 등 여러 가지 대책을 세우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애는 병조판서를 겸임하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되어 명실공히 전시 행정의 총수가 되었으며, 이후 영의정이 되었다.
왜군이 신무기를 앞세우고 공격해 오자 아무런 대책이 없던 아군은 파죽지세로 밀리게 되었다. 결국 도성의 함락이 목전에 이르러 조정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되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피란길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 서애가 선조의 옆을 지켰다.
이와 관련하여 하회마을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으로 원군 왔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여송이 선조의 얼굴이 못생겼다는 트집을 잡으며 전투에 참여하기를 늦추자, 서애는 선조에게 밤이 되면 큰 항아리에 목을 넣고 곡을 하라고 시켰다. 밤이 되자 항아리에 울린 선조 임금의 곡소리가 천지를 흔드는 것 같았는데, 이 울음소리를 들은 이여송이 “무슨 소리냐?”며 서애에게 물었다. 서애는 나라가 위태로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임금의 곡소리라고 전했고, 이여송은 그 곡소리에 감명을 받아 전투에 참여하기를 서둘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지혜를 발휘하여 국난을 극복한 서애의 일화는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서애는 새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조총 등의 신무기를 연구하여 만들게 하였고, 한편으로 남한산성을 비롯한 여러 산성을 쌓는 등 왜적의 침입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기 한 달 전 서애는 북인의 모함을 받아 정계에서 물러나 57세의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뒤에 서애의 무고함이 밝혀져 공신으로 직첩이 내려지고, 조정에서 공신의 초상을 그린다 하여 두 차례나 사람이 내려왔으나 “내게 무슨 공이 있겠느냐.”며 끝내 초상을 그리지 못하게 할 정도로 겸허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간 지 30년, 재상의 자리에만 10여 년을 있었으나 청빈하여 끼니를 잇기가 어려울 만큼 가난한 생활을 하며, 임진왜란의 참담했던 일을 기록하여 『난후잡록(亂後雜錄)』과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였다.
원본이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은 서애가 영의정에서 물러난 직후부터 임진왜란을 회고하며 전후(前後)의 사정을 적은 책이다. 서애의 대표 저작으로 손꼽히는 『징비록』의 서문을 몇 대목 간추려 본다.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란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거기에 임란 전의 일도 간혹 기록한 것은 임란의 발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아! 임란의 전화는 참혹하였다. 수십 일 동안에 삼도(三都)를 지키지 못하고 팔도가 산산이 깨어졌으며, 임금께서 피란하셨다. 그리고서도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천운이다. …… ‘내 지난 일을 징계(懲)하여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毖)하노라’고 했으니, 이것이 『징비록』을 저작한 까닭이다. …… 이에 한가로운 틈을 타서 내 이목으로 겪은 임진년(1592년)으로부터 무술년(1598년)에 이르기까지 일을 대략 기술하니, …… 비록 보잘것없지만 모두 그 당시의 사적이므로 버리지 않고 두어서, 이것으로 내가 전원에 있으면서도 성심으로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뜻을 나타내고 또한 어리석은 나의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나타내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기록물은 많지 않다. 서애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요직에 있었고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라는 높은 관직을 맡았던 인물이다. 이 때문에도 그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쓴 『징비록』은 학계에서 중요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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