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A01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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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임재해 |
풍산류씨는 어떤 과정을 거쳐 하회마을에 자리를 잡았을까? 풍산류씨가 하회에 자리 잡은 것은 고려 후기이다. 겸암과 서애의 6대조인 전서공(典書公) 류종혜(柳從惠)가 풍산 상리(上里)에 세거하다가 길지를 찾아 지금의 하회마을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사실 류씨들이 하회에 세거지를 마련한 것은 전서공이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기 훨씬 이전, 곧 전서공의 할아버지이자 고려의 도염서령(都染署令)이라는 벼슬자리에 있던 류난옥(柳蘭玉)이 풍수가를 찾아가서 택지를 구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3대가 적선을 해야만 훌륭한 길지를 구할 수 있다고 하는 풍수가의 말에 따라 류서령은 하회마을 밖 큰길가에 관가정(觀稼亭)이라는 집을 짓고,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적선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 일은 아들과 손자 대까지 이어졌다. 전서공이 류서령의 뜻을 이은 것이다. 이러한 적선의 공덕으로 마침내 길지를 잡아 지금의 하회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는데, 이러한 사정은 마을 입구를 조금 지나 있는 류종혜의 기적비(紀蹟碑)에 자세히 새겨져 있다.
풍산류씨들이 화천의 하안(河岸)에 터를 잡을 당시 이 일대는 울창한 숲과 늪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삼신당 곁에 절이 하나 있었으나,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스님들이 견디지 못하고 떠나 버려 절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화천의 하안은 울창한 숲이었던 듯싶다.
탑신(塔身)들이 아직 삼신당 주변에 하나 둘 흩어져 있어 사찰이 있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데, 지금도 그 탑신 가운데 하나가 삼신당의 제단(祭壇)처럼 이용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전서공이 직접 화산을 답사한 뒤에 주변의 허씨와 안씨의 묘지를 피하여 울창한 숲을 헤치고 절 주변에 터를 잡고 나무를 베어 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집이 완성될 듯싶다가 거듭 무너지는 괴이한 일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나가던 도사가, “아직 이 땅을 가질 운세가 아니니, 꼭 이 땅을 가지고 싶다면 앞으로 3년간 덕을 쌓고 적선을 해야 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전서공은 큰고개 밖에 정자를 지어 놓고 식량과 옷가지, 짚신 등을 마련하고는, 큰 가마솥에다가 밥을 하여 인근 주민과 나그네들에게 먹이고 입히며 적선하기를 3년 동안 했다. 그런 연후에 지은 것이 지금의 양진당 사랑채 일부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전서공이 하회에 터를 잡고자 양진당 자리에 집을 지었는데, 지어놓기만 하면 밤새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서공의 꿈에 도사가 나타나 이르기를, 이 터에 집을 지으려면 마을로 들어오는 고갯길에서 3년 동안 만인(萬人)에게 적선을 하라고 이르므로, 고개에다 원두막을 지어놓고 길 가는 사람들에게 적선하고 집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전서공이 길지를 잡아 발복을 한 까닭인지 점차 류씨 가문은 번성하고 겸암과 서애 이후 대단한 문벌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화산 기슭의 허씨와 안씨 들은 문중이 위축되어 마을을 뜨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하회마을의 중심지가 화산 기슭에서 지금의 화천가 하안에 자리 잡은 류씨들의 세거지로 옮겨 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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