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25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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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人 |
영어의미역 | Righteous Person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집필자 | 정순임 |
[정의]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안동 지역에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의로운 활동을 한 인물.
[개설]
안동은 예로부터 충효의 고장, 선비의 고장으로 나라가 어려운 형편에 처했을 때 많은 의로운 이들이 떨쳐 일어났다. 대표적인 예로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한 이들, 일제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5월 4일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어 경상우도의 함양에 이르러 여러 지방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격문을 발송하였는데, 이후 격문에 감동하여 각 지방에서 적극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안동과 예안에서도 김성일의 초유문이 도착하자 애국적 문장에 고무되어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조목(趙穆, 1524~1606)은 6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조직하는 데 적극 후원하였다. 조목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수집하는 일을 예문관검열로 벼슬에서 물러난 김해(金垓, 1555~1593)로 하여금 주선하게 하여, 6월 1일에는 진사 배용길(裵龍吉, 1556~1609) 등이 퇴계에 모여 각 마을별로 책임자를 두고 군대를 모집하였다.
열흘 뒤 여러 마을의 대표들이 모여 김해를 안동열읍향병대장(安東列邑鄕兵大將)으로 추대하는 한편, 진사 이숙량(李叔樑, 1519~1592)으로 하여금 인근 고을에 글을 지어 보내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가담하게 하였다. 안동부의 모병 논의는 여강서원에서 이루어졌는데 향병대장에 생원 김윤명(金允明, 1541~1604), 군량도감에 류복기(柳復起, 1555~1617)를 뽑았다. 그러나 며칠 뒤 김윤명의 사양으로 이정백(李庭栢, 1553~1600)을 향병대장으로 선출하고, 안동향교에서 의병들에 대한 검열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안동을 비롯한 인근 고을 의병들도 어느 정도 군대의 모습을 갖추어 연합 체제 구축 작업이 진행되었다. 1592년 8월 20일 안동·예안·의성·의흥·군위의 의병들이 안동 일직(一直)에 모여 서로 연합하기로 다짐하고 군대의 이름을 ‘안동열읍향병’이라 칭하는 동시에 김해를 다시 대장으로 삼고 본진은 안동으로 하였다. 안동열읍향병은 관군과 원만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정한 곳에 모여 낮에는 왜군을 추격하여 사로잡고 밤에는 진영을 기습한 다음 분탕질을 하여 상당한 피해를 안겨 주었다.
의병들은 병력과 무기 면에서 왜군에 비하여 아주 열세에 놓여 있었으나 지리에 밝은 이점을 이용하여 게릴라전을 구사함으로써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이듬해인 1593년 3월에는 우도병마사 권응수(權應銖, 1546~1608)와 합세하여 당교의 왜군을 격파하고, 정예병을 뽑아 상주(尙州) 송현(松峴)과 조령의 왜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강력한 군국주의를 표방한 일본은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우고 대륙 팽창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반도 침략을 감행하였다. 의병은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처음으로 봉기하였다. 갑오의병 단계에서는 안동의병과 상원의병 등 두 의진이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 가운데 현재 의병의 효시로 알려진 의진은 1894년 7월에 일어난 안동의병이다. 안동의병을 이끌었던 서상철은 제천의병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서상렬과 한집안 사람으로 화서 이항로 학파에 속한 전형적인 유생이었다.
의병장 이인화(1859~1929)는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출신으로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당시 안동과 예안 지역에서 군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켰고, 안동의진을 중심으로 상주에 있던 일본군 공격에 참여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또 1910년대 계몽 운동을 위해 지금의 도산면 서부리에 선성의숙을 설립하고 교사로 활동하였다. 지난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때에도 많은 안동 출신 인사들이 정부, 지원 부서, 한국광복군 등에 참여하였다. 특히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은 안동에서 김동삼(金東三, 1878~1937)·류인식(柳寅植, 1865~1928)과 의병 활동 및 애국 계몽 운동(협동학교)을 전개하였고, 1911년 만주로 이주하여 서로군정서 독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냈다. 김동삼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우는 첫 회의에 참석했고, 초대 국민대표회의 의장을 맡았다.
김응섭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차장(1919~920), 김형식은 간서총판부 부총판(1920), 류림은 국무위원(1940년대)으로 활동하였다. 이 밖에도 안상길·김재봉 등 수많은 안동 사람들이 군자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고, 1940년대에는 한국광복군에 참가해 나라 찾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