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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804
한자 李準泰
영어음역 Yi Juntae
이칭/별칭 학암(鶴巖),일강(一岡),일봉(一熢)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상리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강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상리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91년연표보기
본관 예안
대표경력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부 위원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준태(李準泰)는 본관이 예안(禮安)이고, 호는 학암(鶴巖)·일강(一岡)·일봉(一熢)이다. 1891년 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상리리에서 예안이씨 21세손 이수학(李洙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이준태는 1909년 안동금곡측량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서울에 있는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 금공과(金工科)를 마쳤다. 이후 임시토지조사국 사무원급기술양성소를 수료하였으며,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기사를 역임하였다. 이준태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시기는 1920년 무렵이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북교통부장으로 임명되어 국내로 파견된 안상길(安相吉)김재봉(金在鳳)을 서울에서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금 모집 활동에 관여했다.

이후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하여 1922년 1월 무산자동지회를 발기했고, 무산자동맹회·신사상연구회·화요회·신흥청년동맹·정우회(正友會) 등의 간부와 불꽃사[火花社]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3월 개최된 전조선청년당대회에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이 무렵 경성고무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 투쟁 사실을 일반인들에게 알리고자 노동연맹회에서 「경성고무 여공 동맹파업에 대한 전말」이라는 보도 문서를 작성하여 노동 단체에 알렸는데, 이때 출판법 위반 혐의로 벌금형에 처해졌다.

또한 이준태는 코르뷰로(조선공산당 중앙총국) 국내부 결성에 참가하였으며, 1923년 11월 권오설(權五卨)과 함께 풍산소작인회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사상 단체인 화성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에 안동군 대표로 참가하여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4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고, 10월 조선노농총동맹 야체이카와 노농부 프락션에 배속되었다.

1925년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 이후 당 중앙집행위원으로 보선(補選)되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부 위원으로서 당 업무를 담당하였다. 1926년 5월 조선공산당 교섭대표자로 선임되어 고려공산동맹 대표자 이정윤(李廷允)·이영(李英)과 함께 양 단체의 통합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준태는 1926년 6월 2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준태는 일본 경찰의 고문 행위를 폭로하기 위해 검거된 사람들과 함께 경성지법 검사국에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을 고소하기도 하였다. 1928년 2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았으며, 광복 후인 1945년 12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에 안동군 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검사위원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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