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692
한자 柳后稷
영어음역 Ryu Hujik
이칭/별칭 류동붕(柳東鵬),유후직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한준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94년연표보기
몰년 1956년연표보기
본관 전주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또 다른 이름은 류동붕(柳東鵬)이다. 1894년(고종 31)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 전주류씨 동성마을에서 태어났다. 현재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번지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묘가 있다.

[활동사항]

류후직은 1907년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에 설립된 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협동학교는 안동의 혁신 유림인 김대락(金大洛)·이상룡(李相龍)·류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이 참여하여 인재를 양성한 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었다. 그러다 1919년 고종의 죽음으로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펼쳐지자, 그는 이것을 기회로 나라를 되찾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류후직은 1919년 3월 안동면 만세 시위 중 3월 18일 2차 시위와 3월 23일 3차 시위를 계획·주도하였다. 먼저 안동면 2차 만세 시위는 계획 단계에서 안동교회와 유림들에 의해 두 갈래로 준비되고 있었다. 류후직을 비롯한 김익현(金翊顯)·김계한(金啓漢) 등은 서로 의논하여 3월 18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드디어 3월 18일 장날 낮 12시 삼산동 곡물전(지금의 신한은행과 농협 안동지부 중간 지점) 앞에서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고, 이들은 안동 시내 곳곳을 다니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다가 3월 19일 0시 50분 무렵 2,500여 명이라는 시위 군중들이 모여들자 일제 식민통치기관인 군청, 경찰서,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등에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다음 장날인 3월 23일 안동면 3차 만세 시위는 안동군민이 대거 참가하여 오후 7시 30분 시작되었다. 이들은 구속자 구출을 위해 경찰서와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으로 밀고 들어갔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30명이 죽고 5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큰 피해를 당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류후직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과 5월 2일 대구복심법원을 거쳐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