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류연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677
한자 柳淵建
영어음역 Ryu Yeongeon
이칭/별칭 일도,유연건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고천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한준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고천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92년연표보기
몰년 1951년연표보기
본관 전주
대표경력 신간회 안동지회 서무장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일도(一島)이다. 1892년(고종 29)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고천리에서 출생하여 1951년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류연건은 1914년 6월 이강래(李康來)·이승호(李承鎬)·김정빈(金正彬)·남정호(南廷鎬)·신언학(申彦學)·이승직(李承稷) 등과 서울에서 비밀회의를 하여 중화민국 총통 원세개(遠世凱)가 구한국공사로 있을 때 고종이 중국 육군장군 마건충(馬建忠)에게 은 20만 냥을 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 자금을 받아 중국 간도에 건북유한공사(建北有韓公司)라는 단체를 조직한 뒤, 이 단체를 통해 미국 하와이 주재의 조선인과 연락해 국권 회복을 도모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 국권 회복의 방안으로 만국평화회의 때에 원세개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제의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이강래는 고종의친왕 명의의 위조인(僞造印)을 만들어 성명서·위임장·유시문을 각각 1통씩 작성하고, 류연건은 이를 가지고 지방으로 내려와 동지를 규합하고자 하였다. 이 활동으로 체포된 류연건은 1916년 12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류연건은 1920년 8월 22일 창립된 안동불교청년회에 참여하였으며, 1921년 4월에는 노동야학부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또 1920년 9월 23일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에 참여하여 1921년 7월에 열린 제2회 총회에서 간사로 선출되었다. 1925년 3월에는 길안청년회 혁신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도산서원철폐운동집행위원이 되었다. 이 무렵 류연건은 『조선지광(朝鮮之光)』 안동지국 기자, 안동기자단 창립준비위원, 안동청년연맹 간부, 화성회(火星會) 간부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1925년 예천형평사 습격 사건이 일어나자 류연건은 안동에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결성된 연합회의에 참석하고, 신문에 형평사 사건을 게재하였다. 이 활동으로 형평사를 공격했던 김석희(金碩熙)와 장수암(張守岩)에 의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여 징역 8월형을 받았다. 이후 류연건은 1927년 길안청년회 집행위원, 1929년 신간회 안동지회 간사 및 서무장으로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3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