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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673
한자 柳時彦
영어음역 Ryu Sieon
이칭/별칭 류해동(柳海東),김세진(金世鎭),유시언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한준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95년연표보기
몰년 1945년연표보기
본관 풍산
대표경력 국민대표회의 위원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또 다른 이름은 류해동(柳海東)·김세진(金世鎭)이다.1895년(고종 32)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에서 출생하여 1945년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류시언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 명령을 받고, 같은 해 다시 국내로 돌아와 류시준(柳時俊)·류성우(柳性佑)와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920년 2월 류시언은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의 장수학(張守學)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로 보냈다. 이러한 사실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류성우는 체포되어 옥사하였으며, 류시언은 1921년 11월 29일 대구지방법원 궐석판결에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류시언은 의주와 만주를 거쳐 북경으로 피신하였고, 이곳에서 김정묵(金正黙)·최용덕(崔用德) 등과 함께 집의학교(集義學校)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922년 봄 류시언은 베이징[北京]을 떠나 길림으로 돌아가 길림교육회의 운영을 맡아 교육을 진흥시키는 한편,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자 길림교육회의 대표로 이에 참석하여 헌법기초위원·교육위원장에 선임되어 통합된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뚜렷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내분이 계속되자 류시언은 만주로 되돌아가 독자적인 항일투쟁을 모색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류시언은 1924년 10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0년에 건국포장을 받았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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