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6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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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東壽 |
영어음역 | Ryu Dongsu |
이칭/별칭 | 시일(始一),위남(渭南),유동수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한준호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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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
성별 | 남 |
생년 | 1898년 |
몰년 | 1983년 |
본관 | 전주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시일(始一), 호는 위남(渭南)이다. 1898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수곡리에 묘가 있다.
[활동사항]
류동수는 일찍이 한문을 수학하며 쓰러져 가는 나라를 늘 걱정하다가, 1919년 고종 황제의 죽음으로 전국적으로 3·1만세시위가 펼쳐지자 이것을 기회로 나라를 되찾고자 하였다. 안동 지역의 3·1만세시위는 3월 13일부터 3월 27일까지 안동·예안·임동·임하·길안 등 11개 지역에서 14회에서 걸쳐 일어났다. 이 가운데 류동수는 1919년 임동면 중평동 편항시장(鞭巷市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임동면 만세시위는 류연성(柳淵成)·류동수(柳東洙) 등이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장날인 3월 21일 오후 2시경 편항장터에 모인 시위 군중을 이끌면서 전개되었다. 또 이들은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와 면사무소로 달려가 독립만세를 부르며 건물을 공격하는 등 과감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류동수는 체포되어 5월 31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으며, 향리에서 후진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