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5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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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永昌 |
영어음역 | Gim Yeongchang |
이칭/별칭 | 김영창(金永唱),성연(成淵)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계곡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한준호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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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계곡리 |
성별 | 남 |
생년 | 1884년 |
몰년 | 1943년 |
본관 | 광산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성연(成淵)이다. 1884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계곡리에서 태어났다. 묘는 안동시 와룡면 주계리에 있다.
[활동사항]
강직한 성품으로 알려진 김영창은 일찍이 서당에서 수학하며 쓰러져 가는 나라를 항상 걱정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고종 황제의 죽음으로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펼쳐지자, 김영창은 이를 기회로 나라를 되찾고자 하였다. 안동에서의 3·1만세시위는 3월 13일부터 3월 27일까지 안동·예안·임동·임하·길안 등 11개 지역에서 14회에서 걸쳐 일어났다. 이 가운데 김영창은 1919년 임동면 중평동 편항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영창은 류연성(柳淵成)·류동수(柳東洙) 등과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장날인 3월 21일 오후 2시경 편항장터에 모인 시위 군중을 이끌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김영창 등이 이끄는 시위 군중은 주재소와 면사무소로 달려가 독립만세를 부르며 건물을 공격하는 등 과감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일로 김영창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8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