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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내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481
한자 鄭來成
영어음역 Jeong Naeseong
이칭/별칭 기서(岐瑞),사헌(思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만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744년(영조 20)연표보기
몰년 1835년(헌종 1)연표보기
본관 청주
대표관직 병조참지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기서(岐瑞), 호는 사헌(思軒). 아버지는 정중섭(鄭重燮),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사예 권만원(權萬元)의 딸이다.

[활동사항]

정내성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세 때에 부친이 달을 가리키며 시를 지으라 하자 “반달이 하늘에 있어 비록 작더라도 천하를 밝히도다(半月在天中 雖小明天下)”라고 즉석에서 읊어 내어 부친과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20세 이후 초시에 합격한 후 복시에 응시하였으나 연달아 실패한 뒤, 과거에 전념하다 보면 인생을 그르치게 된다고 탄식하며 자신잠(自新箴)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였다.

이후 경전을 공부하는 데 전력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단지 외우는 데만 힘쓰는 것을 옳게 여기지 아니하고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제가(諸家)의 설을 참조하여 「경술변(經術辨)」을 지어 그릇된 공부 방식에 경종을 울렸다. 또한 항상 후배들에게 “『논어(論語)』는 단지 의리(義理)를 배우는 책만이 아니라 문장(文章)을 짓는데도 그 간결한 문체를 본받아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1780(정조 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가 되었다. 1782년 효릉별검을 제수 받았으며 1784년 강화도에 있는 장녕전별검(長寧殿別檢)으로 옮겼다. 참하관(參下官)으로서의 근무일수가 차니 전례에 따라 참상관(參上官)으로 진급하여 성균관전적을 제수 받았다가 곧바로 예조좌랑으로 옮겼다. 얼마 뒤에 전라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에 조정에서는 사직이 허락되지 아니하였는데도 부임하지 아니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령이 내려져 의금부에 7일 동안 갇혔다가 풀려났다. 이때부터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는 일과 경전을 공부하는 일로 일과를 삼았다.

1799년 장악원주부를 제수받고 얼마 후 조경묘령(肇慶廟令)으로 옮겨 근무하다가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사직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809년(순조 9) 경상도사를 제수받자 과거 전라도사에 부임하지 않아 하옥당하였던 일 때문에 거부하지 못하고 임금 앞에 나아가 사은숙배만 하고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벼슬에 뜻이 없는 정내성을 벼슬길로 불러내기 위하여 1812년에서 1814년까지 세 차례나 사헌부지평의 벼슬을 내렸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22년 재차 사간원정언을 제수하자 경상도의 경계인 조령 아래까지 나아가서 장문의 「사사간원정언소(辭司諫院正言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를 통하여 이미 나이가 79세나 되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으니 사직을 허락하여 달라는 청원과 함께 시무(時務)에 대한 육조(六條)의 대책을 제시하였는데, 모두 경험에서 우러나온 간절한 호소였다. 1823년 당상관에 올라 부호군을 제수받았고 1825년에 돈녕부도정, 1827년 병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835년 한성부좌윤을 제수받았다가 곧 체직되었으며, 같은 해 9월 3일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사헌집(思軒集)』 6권 3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안동시 동쪽 묵동(墨洞)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34년(순조 34) 수직으로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제수받고 삼대(三代)가 증직되는 은전을 입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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