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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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琓 |
영어음역 | Yi Wan |
이칭/별칭 | 수언(粹彦),구애(龜厓),천성사노(川城四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배종석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 전주(全州). 자는 수언(粹彦), 호는 구애(龜厓). 태종의 서자인 근녕군(謹寧君) 이농(李禯)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이영기(李榮基), 아버지는 이시항(李時恒), 어머니는 여주이씨(驪州李氏)로 이환(李煥)의 딸이다. 형은 허직(虛直) 이선(李瑄)이다.
[활동사항]
이완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잃고 형 이선(李瑄)에게 글을 배웠다. 이선은 당시 이름이 알려진 학자였는데 동생을 가르침에 있어 몹시 친애하면서도 한편으로 가르침의 법도를 잃지 않았다. 이완 또한 형을 믿고 따르면서 마치 엄한 스승을 모시듯 하였다.
평소 가사에 크게 마음 쓰지 않아 가족이 늘 빈곤하게 살았다. 중간에 황산으로 거처를 옮겨 네댓 곳을 전전하였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결코 안색을 바꾸지 않았으며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늘 경전을 가까이 하여 병들어 부득이 그만두는 경우가 아니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권두인(權斗寅), 권두경(權斗經), 이동완(李棟完)과 함께 교유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천성사로(川城四老)’라 일컬었다. 특히 이동완과는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을 여러 차례 주고받았다.
이완은 일찍부터 문학에 조예가 있어 15, 16세에 시문(詩文)으로 과장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향시와 한성시에 연달아 합격하고 더러 2장, 3장을 이어서 보아도 합격했지만 끝내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아깝게 여겼으나 이완 자신은 개의치 않았다. 언젠가 형 이선이 정릉랑(貞陵郞)으로 있을 때 과거를 보고 함께 시험을 치른 사람들과 직사에 머무른 일이 있었다.
합격방이 붙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모두들 마음을 졸이며 떨어진 사람은 한탄해 마지않았는데 이완만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이를 본 이선이 “성공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그 기상이 있어 뜻을 이루어야 가라앉는 법인데, 이 아이는 의연하기가 이와 같으니 이름을 날리기는 힘들 것 같구나.”라고 말하며 이완의 의연한 성품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아들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에도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 『주역(周易)』 겸괘(謙卦)의 이치를 담은 글을 지어 몸가짐을 경계시켰다. 또 아들이 금정역의 관원으로 발령받자 다시 가르침을 담은 글을 주어 나라와 임금에게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면서 과거 급제 자체보다 관료로서의 몸가짐을 더 중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완은 늘 책을 보다가 고인들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 중에 본받고 경계될 만한 것을 취해서 반드시 기록하고 실천하였다. 또 문장을 지을 때도 어렵고 기교한 말을 쓰지 않아서 쉽고 전아하면서도 법도가 있다는 평을 들었으며 아울러 성리학에 관한 논술을 많이 남겼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구애집(龜厓集)』이 있다. 문집은 조카 이인보(李仁溥)가 1730년대 말에 처음 간행하였고, 1909년 5세손인 이면주(李冕宙)가 중간하였다. 총 6권 천(天)·지(地)·인(人) 3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묘소]
봉화 춘양현(春陽縣) 용폄촌(龍窆村)에서 장례 지냈다가 이듬해 춘양현 솥골(鼎洞, 현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후손들이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 갈방마을에 구애정(龜厓亭)을 지어 이완의 학덕을 추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