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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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槾 |
영어음역 | Yi Man |
이칭/별칭 | 군직(君直),고재(顧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명수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유생.
[가계]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군직(君直), 호는 고재(顧齋). 할아버지는 이시명(李時明), 아버지는 이융일(李隆逸), 어머니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김해(金垓)의 후손인 처사 김초(金礎)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만은 현재의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인 1689년 안동의 동파리에 옮겨 살았다. 10세에 소학을 배운 이래로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들어가 육경(六經)과 사서(四書),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자전서(朱子全書)』, 『퇴계집(退溪集)』 등을 읽어 학문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근사록』과 『심경』에 밝아 인근의 노성한 선비들도 감탄을 하였다.
향시에는 세 차례 합격하였으나 문과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조현명(趙顯命)이 경상도감사로 부임하여 문교 진흥을 위하여 각 고을의 향교와 서원을 선비들의 교육장으로 만들면서 안동은 영남에서도 학문의 중심지라고 하여 이만에게 선비 교육의 책임을 맡도록 강청하였다. 몇 번이나 사양한 끝에 어쩔 수 없어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나아가서 규칙을 정하고 교육에 전념하였다. 만년에 안동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한편, 조현명이 학행으로 추천하여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서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감사 김시동(金始烔)과 어사 이종백(李宗白)이 번갈아 천거하였다. 영조가 이만의 이름을 전각의 기둥에 적어 두고 도백(道伯)을 시켜 수레를 보내 올라오도록 시켰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10권 5책의 『고재집(顧齋集)』이 있다. 문집에는 151편의 서간문이 있는데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부임하여 교유하였던 관원, 안동 주변의 명사, 퇴계학파를 주도하던 이름난 문인들과 주고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