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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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邊中一 |
영어음역 | Byeon Jungil |
이칭/별칭 | 변중일(邊仲一),가순(可純),간재(簡齋)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만기 |
성격 | 유생|의병|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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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
성별 | 남 |
생년 | 1575년(선조 8) |
몰년 | 1660년(현종 1) |
본관 | 원주 |
[정의]
조선 중기 안동 출신의 유생이자 효자.
[가계]
본관은 원주(原州). 초명은 변중일(邊仲一), 자는 가순(可純), 호는 간재(簡齋). 증조부는 변광(邊廣), 할아버지는 변영청(邊永淸), 아버지는 생원 변경장(邊慶長),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정희순(鄭希舜)의 딸이다.
[활동사항]
변중일은 안동부(安東府) 금계촌(金溪村, 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18세 때인 임진왜란 당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숨었으나 할머니 이씨(李氏)가 더위를 먹어 설사가 매우 심한 까닭에 피할 수 없었는데 변중일은 할머니를 모시고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루는 포 소리가 요란한 끝에 왜적이 몰려오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당황해 했다.
변중일은 먼저 어머니를 업어다 빽빽한 삼밭 가운데 모시고 난 뒤 돌아와 할머니를 업고 달아나려고 했는데 천식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에 곁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빌 뿐이었다. 잠시 후 한 왜적이 돌입하여 때리며 끌고 가려 하다가 할머니가 땅에 엎어지자 칼로 베려 하였다. 이에 변중일은 “차라리 나를 죽이고 팔십 되신 조모를 살려 달라.” 하고 간청하자 여러 왜적들이 급히 달려와서 부축하여 일으킨 뒤 얼굴의 흙을 털어 주며 들어가 시병하게 하였다.
왜적들이 감탄해 마지않으면서 “이만한 효성은 참으로 처음 보는 일이로다.” 하였다. 이어 서로 돌아보며 의논하기를 “우리 군대의 발이 닿으면 자칫 해를 당할 염려가 있다.” 말하고는 깃발 하나와 칼 하나를 변중일에게 주면서 신표로 삼으라고 하였다. 마침내 왜적이 집기 하나 손대지 않고 조용히 물러갔으며, 어머니도 온전할 수 있었고 할머니의 병도 나았다.
당시 한양을 지키지 못하여 온 나라가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는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영남을 안찰하면서 어느 지역을 초유(招諭)할 때 변중일은 분연히 말하기를 “국가의 위급함이 이와 같은데 비록 초야에 묻힌 미거한 몸이지만 어찌 힘을 다하여 국가에 충성하지 않겠는가?” 말하고는 쌀 백 섬을 상주로 보내어 군수품으로 쓰게 하였다.
그런 뒤에 형 변희일(邊喜一)과 더불어 진양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김성일이 병사했음을 알고는 몸을 맡길 곳이 사라졌음을 통분해 하다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의 진중으로 급히 가서 군중의 기무에 투신하였다. 1597년(선조 30)에 왜적이 다시 창궐함을 보고 다시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가서 다른 창의한 이들과 힘을 합하여 적을 물리치기로 맹약하였는데 이때의 사정을 기록한 「화왕동맹록(火旺同盟錄)」이 전한다. 난이 안정된 뒤에 여러 친척들이 변중일의 효행을 열거하여 관청에 알리고자 하였는데 내세울 일이 아니라 하여 극력 만류하였다.
선대에 사패(賜牌)로 받은 노비 30구가 가락 땅(김해)에서 살고 있었는데, 임금이 주신 것을 버릴 수 없다 하여 변중일이 가서 그들을 추쇄하려다가 도리어 뜻밖의 무고를 입어 경옥(京獄)에 감금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특명으로 사면되었으며 노비 100구를 하사받았다. 서울에 머물 때에 형방 색리 최옥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일찍 과부가 된 최옥의 딸이 어느 날 밤 변중일의 침소로 찾아든 일이 있었다. 변중일은 남녀의 분별을 들어 타이르고 거절한 뒤에 곧 다른 집으로 처소를 옮겼다.
만년에는 금계의 동쪽 언덕에 집을 짓고 ‘간재(簡齋)’라고 편액한 뒤 그것을 호로 삼았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몸을 정결히 하고 사당에 절한 뒤에 물러나서는 방안에 앉아 종일토록 절제하며 서책을 가까이하였으며, 때로는 거문고를 옆에 끼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조용히 시를 짓고 수창하기도 하였다.
뒤에 행의(行義)로 천거되어 건원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가 죽자 소식(素食)을 하고 복상하였으며, 인산(因山: 왕족의 상) 2년째에 북향한 채로 땅에 엎드려 슬피 울었다. 나이 팔십이 넘어 통정의 품계에 오른 뒤 1660년(현종 1) 10월 20일 정침에서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간재집(簡齋集)』 2권 1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회동(檜洞)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86년(숙종 12) 경상도안찰사가 변중일의 충효에 대한 행적을 조정에 알려 조정에서 정려가 내려지고,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마을 입구에 정충효각(旌忠孝閣)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