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825 |
---|---|
한자 | 崇禎處士遺墟碑 |
영어공식명칭 | Stele of Kim Sion |
영어음역 | Sungjeongcheosa Yuheob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구수리 17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진영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5년 8월 5일 - 숭정처사유허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1호 지정 |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숭정처사유허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성격 | 비|유허비 |
건립시기/일시 | 조선 후기 |
관련인물 | 김시온(瓢隱 金是榲, 1598~1669)|이재(李栽)|김성월(金聖鉞) |
재질 | 화강암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구수리 174 |
소유자 | 김창균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구수리에 있는 조선 후기 유허비.
[개설]
김시온(金是榲, 1598~1669)은 자는 이승(以承)이며, 호는 표은(瓢隱)이다. 참봉을 지냈으며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상징하는 숭정처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연(陶淵)에 은거하여 산천을 즐기면서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영조 때는 사헌부집의에 증직되었다. 인근에서 숭정처사로 추앙되는 인물로는 봉화의 홍우정(洪宇定)과 상주의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가 있다.
[건립경위]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한 사실을 개탄하여 와룡산(臥龍山) 아래 도연 위에 와룡초당(臥龍草堂)을 짓고 은거한 김시온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위치]
숭정처사유허비(崇禎處士 遺墟碑)는 길안면 구수리 174번지에 위치한다. 원래는 도연폭포 옆인 길안면 용계리 146번지에 있었으나, 1987년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안동역에서 안동대학교 방면으로 가다가 안동대앞교차로에서 영천·길안 방면으로 진입한 뒤 국도 35호선 영천·길안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15㎞ 정도 가다가 지방도 914호선 길안면사무소 앞에서 청송 방면으로 들어선다. 이곳에서 6㎞ 정도 다가가 임동·용계 방면으로 1㎞ 정도 가면 구수리가 나온다.
[형태]
화강암으로 된 사면 비이다. 좌대(座臺)는 직육면체로 윗면에 연화문, 옆면에 안상(眼象)을 새겼다. 비신 사면에는 돌아가며 비문을 기록하였는데, 제액(題額)은 전면의 중앙에 길이 17㎝ 정도의 큰 글자를 종서로 썼으며, 그 양쪽으로 비문의 서두와 말미가 새겨져 있다. 이수(螭首)는 윗면을 호형(弧形)으로 한 육면체이며 구름무늬가 가득 새겨져 있다.
[금석문]
비문은 밀암(密庵) 이재(李栽)가 짓고 김시온의 족증손(族曾孫)인 김성월(金聖鉞)이 썼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숭정처사김공유허비 사람이 참으로 조용한 곳을 즐겨 숲과 연못을 찾아 부귀와 영화를 버리는 자는 비록 그의 맑은 모습과 빼어난 운치가 저 중국의 은둔자인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백중을 겨룬다 해도 군자가 그것을 볼 때는 ‘자기 몸만 깨끗이 하여 무리를 어지럽힌’ 기롱을 면치 못하리니 어찌 숭상할 만하겠는가.
오직 천하의 큰 인륜을 밝히고 일세의 대의(大義)를 부지하며 높은 지위를 진흙에 던지고 자신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어 그 같은 풍성과 기열이 우뚝하게 삼강오상의 중함을 더하기에 충분한 뒤라야 지극하게 되었다 할 것이다. 옛사람으로 서산(西山)에서 굶어 죽은 동국(東國)의 고사(高士)와 저 진나라 징사(徴士)와 송나라 유민과 같은 몇 분의 군자는 이로 말미암아 전성(前聖)과 후현(後賢)들이 누차 칭송하였는데, 칭송한 이들은 무엇을 취하고자 함이었던가. 그들은 대개 역시 만세의 강상(綱常)을 위한 계책이었던 것이다.
지금에 표은 김선생(김시온)과 같은 분은 숭정처사로서 와룡산(臥龍山) 아래에서 늙어 세상을 마친 분인데, 그 분이 바로 큰 인륜을 밝히고 대의를 부지하여 삼강오상의 중함을 더하여서 저 몇몇 군자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었던 이가 아닐까? 선생은 어려서부터 모습이 빼어나고, 가슴에 품은 생각이 시원하고 깨끗하여 빛남이 마치 학과 같고 맑은 얼음과 같았으며, 세상에서 얻고 잃음과 기쁘고 슬픔이 마음에 걸릴 것이 없었던 분이다. 선생은 오직 도의(道義)와 명절(名節)로 스스로를 갈고 다듬었던 것이다.
숭정(崇禎) 병자년(인조 14, 1636)에 국가의 비상한 변란이 있자 선생께서는 개연히 곧장 바다로 들어가고 싶은 분함이 있어 와룡산 밑 도연 가에 들어와 초가집을 짓고 송대(松臺)를 만들어 그 집 이름을 와룡재(臥龍齋)라 하고 대표(大瓢)라 자호하였으니 모두 지명을 딴 것이었다.
앞쪽으로는 푸른 암벽과 맑은 물이 있고 기암괴석에 폭포가 떨어지며 백사장과 깊은 소나무 숲들은 동남 지방에서 경치가 가장 빼어난 곳으로 이름났다. 선생은 날마다 그 주위를 이리저리 거닐고 선왕(先王)의 도를 노래했다. 때때로 벗을 모아 술잔을 나누는 모임을 가지면서 대화가 서울에 이르면 문득 가슴 가득한 슬픔으로 몇 줄기 눈물을 뿌렸다. 선생은 이미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으나, 세상에서 선생을 끌어당기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동강(東岡)은 은둔하려는 뜻이 확고하여 변함없었다.
일찍이 ‘내가 죽거든 나의 묘소에는 숭정처사의 묘라고 쓰면 될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선생의 제자인 의조(儀曺: 예조) 원외랑 김학배(金學培) 공이 행장을, 미수(眉叟)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이 묘갈명을 지어 그 같은 사적을 모두 말했다.
아! 지금은 선생의 시대와 50년이 떨어진 때다. 선생의 높은 산악과 같이 우뚝하고 깊은 연못과 같이 침묵하던 모습을 비록 다시 볼 수 없으나, 다행히도 옛집 터가 남아 있다. 강산이 의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하고 흠모하여 마지않게 하니, 참으로 높은 산과 같은 훌륭한 행실이 덕을 좋아함과 같은 것이로다.
대총재(大冢宰: 이조판서)를 지낸 오시복(吳始復) 공이 예서(禮書)를 잘 썼는데 선생의 풍을 듣고는 흠모하여 ‘숭정처사유허’라는 대자(大字) 여섯 글자를 쓰고 그것을 돌에 새겨 그 마을에 세우게 했으니 대개 어진 자를 드러내는 고사에 따른 것이다. 이에 일방의 인사들이 힘을 합해 돌을 다듬었는데, 일을 마치자 나에게 그 일을 상의했다. 나는 선생의 위대한 발자취를 졸렬한 글로 쓸 수 없다는 이유에서 여러 번 사양했어도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외람되게도 그 일의 시종에 나아가 느낀 바를 가만히 이렇게 적었다.
저 높은 지위와 많은 녹을 받고 나라의 은총을 받던 이가 하루아침에 이해관계에 따라 사변을 일으키고 인륜을 해치며 하늘의 기강을 배반하고서도 부끄러워하지 못하자, 선생은 해외의 한 조그마한 몸으로 이름이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깨끗한 바탕에 몸을 맡겨 이에 홀로 숭정일월(崇禎日月)을 한 지역 임천(林泉)에서 보존하였고 자신은 우주의 동량으로 삼아 마치 무너져 오는 파도에 우뚝 선 지주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다른 이유에서였겠나.
다만 충의의 본성이 마음에 가득하고, 취하고 버리는 분수가 밖으로 밝게 드러났으니, 아 부귀와 빈천으로 꺾을 수 없는 것이 있었을 뿐이다. 아! 위대하시도다. 그런데 천추에 한 조각의 돌에 새긴 산문에 우뚝하게 서서 길이 후세인들로 하여금 그윽하게 느낌이 일게 하여 백세가 하루와 같으니 그것이 맑은 바람을 일으켜 완악한 지아비를 청렴하게 하여 만고의 윤리 강상에 기여케 하였다. 이는 곧바로 옛 미정(薇亭)과 취석(醉石)과 함께 아름다운 이름이 있으리니 어찌 다만 한때의 호사(好事)가 된 성도(成都)의 초당비(草堂碑)와 같은 것이겠는가.
선생의 휘는 시온이요, 자는 이승(以承)이다. 선생의 관벌(官閥)·세계(世系)·학문·행업(行業)의 상세한 사항은 이미 다른 분들이 쓴 글과 나의 선생이 태재(太宰) 때 만든 유권(遺卷) 서문에 갖추어져 있기에 나의 군더더기 말을 필요치 않는다. 이어서 시를 쓴다. 그 시는 이러하다.
오직 하늘에서 인간을 내리니 사람에게 인륜이 있는 것을/ 그 인륜은 무엇이던가?/ 부자유친 군신유의가 그것이네/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여! 뉘라서 이 덕을 갖지 않았으리/ 그러나 이익에 갇히어서 그 법칙을 어지럽게 상실하였다네/ 가까운 동료를 보더라도 더러는 이 마음을 바꾸기도 했었다네/ 아득히 머나먼 모퉁이여! 먼 물가에 터를 잡았다네/ 그곳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셨던가! 오직 의를 가지셨던 것을/ 이미 천심을 가지셨던 것을 또한 인기(人紀)로 부지했지/ 와룡 세상 터에 비를 세워서 숭정(崇禎) 절의를 밝게 드러냈네/ 산은 높고 물은 쉼 없이 흐르나니 무궁한 선생의 풍도와 명성일세라.
숭정 병자년 후 82년 정유년(숙종 43, 1717) 정월 경오에 후학 안릉(安陵) 이재 삼가 기록하다. 지금 임금(영조) 을묘년(1735)에 연신(筵臣: 김성탁)의 진달에 의해 특명으로 사헌부집의에 증직되어 병술년(영조 42, 1766) 4월일에 다시 덧붙여 새겼다. 후학 족(族) 증손 김성월(金聖鉞)이 쓰다(崇禎處士遺墟碑 人固有樂幽閒就藪澤屛貴遺榮以爲高者雖其淸標逸穎伯仲箕穎然由君子觀之或不免潔身 亂倫之譏亦何足多尙哉惟其明天下之大倫扶一世之大義泥塗軒冕沒身無悔使其風□氣烈 卓然足以增三綱五常之重然後爲至焉耳古之人有若西山餓夫東國高士與夫晋徴士宋遺民 玆數君子者由此其選也前聖後賢屢稱不一稱者奚取焉盖亦爲萬世綱常計也其□于今有若 瓢隱金先生之以崇禎處士終老臥龍山下者豈非所謂明大倫扶大義增三綱五常之重而無愧 數君子者耶先生自少儀觀秀偉胸襟灑落炯然若玄圃霜毛玉壺淸氷其視世間得喪忻戚無足 嬰其懷者惟以道義名節自飭勵及至崇禎丙子有宗國非常之變先生慨然直有蹈海之憤入臥 龍山下陶淵之上結茅椽理松臺堂名臥龍齋號大瓢皆因其地名也前有翠壁淸瀾奇岩□瀑白 沙深松號爲東南山水窮殊勝處先生日倘佯其間歌詠先王之道有時朋酒之會語及京周則輒 引滿悲憤泣數行下先生旣不樂知於世而世多有推挽之者東岡之志確乎其不變嘗言我死題 吾墓曰崇禎處士之墓可也門人儀曺員外郎金公學培扶其行眉叟許文正公穆銘其墓具言其 事嗟乎今去先生之世且五十年嶽立淵默之相雖不可後見尙幸故垓猶存江山依舊使人想像 欽慕之不已信乎高山景行好德所同前大冢宰吳公始復素善隷聞先生之風而慕之爲書崇禎 處士遺墟六大字使之刻石以表其里盖賢者故事若惟是一方人士合謀治石石旣具俾栽相其 役栽以蹟偉辭拙屢辭不獲命猥次其事終始因竊識其所感於心者曰彼官尊祿厚荷國寵榮者 一朝臨利害遇事變率賊彝倫倍天常而不知恥先生以海外一介眇然之身非有策名委質之素 乃獨保崇禎日月於一區林泉身任宇宙之棟樑有若頹沈之砥柱者豈有他哉特以其忠義之性 鬱於中取舍之分明於外有非富貴貧賤所能撓者而已嗚呼偉哉而况千秋一片石屹然輝映山 門長使後之人摩娑感奮曠百世如一日則其所以激淸風廉頑夫爲萬世倫常之寄直與古之薇 亭醉石幷美齊聲豈但如成都草堂碑爲一時好事已哉先生諱是榲字以承其官閥世系學問行 業之詳已具諸公所撰述及我先太宰所爲遺卷序玆不復贅係之以詩其詩曰 惟帝降衷在人 爲倫其倫伊何父子君臣彼林林者孰無此德惟利是牿紛喪厥則相彼邇僚猶或貳心邈爾海隅 胡漑之鬵 夫豈有爲推義之取旣著天心亦扶人紀臥龍有石昭揭 崇禎山高水長百世風聲 今 崇禎丙子後八十二年丁酉正月庚午後學安陵李栽謹記 上乙卯因 筵臣陳達 特贈司憲府執義 丙戌四月日追刻 後學族曾孫聖鉞書).”
[현황]
숭정처사유허비는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탁본이 국립안동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