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7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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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川古宅 |
영어공식명칭 | Gwon Suk's Old house |
영어음역 | Namcheon Gotaek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422[가일길 1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진영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6년 12월 5일 - 남천고택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24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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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남천고택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성격 | 고가 |
양식 | 민도리 형식 |
건립시기/일시 | 1850년(철종 1) |
정면칸수 | 6칸 |
측면칸수 | 6칸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422[가일길 19] |
소유자 | 권장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전통 가옥.
[개설]
남천고택은 권장(權藏, 1802~1874)이 셋째 아들 권숙(權潚, 1832~1901)의 살림집으로 지어 준 가옥이다. 권숙은 남천고택의 사랑채에서 학문 연구와 문중을 중심으로 한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사랑채의 이런 기능은 조선 후기 범계급적이며 기초적인 일반 서당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이는 반가에 존재했던 지방·문벌·당색별로 폐쇄되어 있던 고차원적 교육기관으로 추측된다. 당호는 권숙의 호인 남천(南川)에서 따온 것이다.
[위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422번지[가일길 19]에 있다.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의 좌측에 남향으로 앉아 있는데, 마을 도로와 연결된 텃밭 좌측을 따라 들어가면 찾을 수 있다.
[변천]
남천고택은 1850년(철종 1) 건립되었다. 남천고택 앞에는 원래 지금보다 훨씬 더 넓은 마당과 여러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텃밭으로 일구어져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형태]
남천고택은 정면 6칸, 측면 6칸의 건물로 정면의 ‘ㅡ’자형 중문간채와 그 뒤편의 안채와 사랑채가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다. 앞마당 전방 오른쪽에 연못을 방형으로 조성하고 그 가운데 원형의 석가산(石假山)을 만들었다. 연못의 전체 형태는 동양 우주관에 따른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조형 원리를 따라 조성된 것으로 원형은 하늘을, 방형은 땅을 의미한다.
사랑채는 중문간채의 맨 우측에 나 있는 중문간에서 뒤편으로 1칸 물러서고 다시 오른편으로 1칸 떨어진 곳에 사랑방과 사랑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집의 머리답게 돋보이도록 크고 높게 지었다. 이 사랑 공간에서 정성 들여 꾸민 앞마당의 연못과 정원을 감상할 수 있다.
안마당에서 사랑방으로의 출입은 사랑방 좌측에 마련된 벽장 옆에 나 있는 문으로 드나드는데, 이 벽장이 사랑 공간에서 안채가 직접 보이지 않게 하는 내외 구분의 차면벽 역할을 하고 있다. 중문에 들어서면 안마당 건너서 안채의 안방과 안대청이 가로로 길게 놓여 마당 폭을 가득 메우고 있다. 안방 좌측에는 안채 부엌과 고방이 세로로 길게 놓여 좌측 날개를 이루고 있고, 안대청 우측에는 마루방·상방·샛방이 뻗어 우측 날개를 이루고 있다.
19세기 말 들어서 가옥은 수장 공간을 많이 확보하고 동선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전퇴(前退)와 후퇴(後退)가 발달하는 평면 구성의 경향을 띤다. 이러한 영향으로 남천고택도 안채와 사랑채에 벽장과 툇마루 및 쪽마루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건물의 구조 양식은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간결한 민도리 형식이다. 대청 상부 가구는 3량가로 대들보 위에 사다리꼴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현황]
남천고택은 1996년 12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2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현재 소유자 및 관리자는 후손인 권장이다. 최근에 앞마당 전방 우측에 연못을 조성하고 그 주변에 수목을 심어 정원으로 꾸몄으며, 안채에 사람이 살고 있어 비교적 관리가 잘되고 있는 편이다.
[의의와 평가]
남천고택은 안채에 벽장을 들이는 등 19세기 전통 주택의 변화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특히 문중 내에서의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서당 기능을 가진 사랑채가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