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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18
한자 壬辰倭亂
영어음역 Imjin Waeran
영어의미역 Japanese Invasion of 1592
이칭/별칭 7년전쟁,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만력(萬曆)의 역(役)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명자(역사)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개설]

16세기 말 조선에서 동인과 서인의 붕당 정치가 전개되는 동안, 일본에서는 1587년(선조 20)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시대를 통일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정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고자 하였고, 1592년 4월 13일 마침내 일본이 부산포에 침입함으로써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조선은 관군의 병력만으로는 일본을 막기에 역부족인 상황에서 각지에서 의병의 활동이 활발한 가운데 명나라가 개입하여 조선과 연합군을 형성하였고, 이후 명나라를 중심으로 일본과 화의 교섭이 이루어졌다. 1596년 강화회의가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입하여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으나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일본이 철수함으로써 7년간의 전쟁은 끝이 났다.

[1차 침입]

일본에서는 모두 9번대 15만 8700명의 병력이 출병하였다. 그중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제1번대는 1592년 4월 13일 가장 먼저 부산에 도착하여 전투를 벌였는데, 일본군을 맞이한 부산진첨사 정발(鄭撥)이 전사한 데 이어 동래부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전사하였다. 첫 싸움에서 승리한 고니시의 부대는 거의 조선 관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인동, 선산을 거쳐 상주에 이르러 순변사 이일(李鎰)이 거느린 조선의 관군을 파하고 조령으로 향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번대는 나고야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하여 제1번대의 소식을 기다리던 중 부산 상륙에 성공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4월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경상좌도를 택하여 장기, 기장을 거쳐서 좌병영 울산을 무너뜨리고 경주, 영천, 신령, 의흥, 군위, 비안, 풍진을 지나 문경으로 빠져 제1번대와 합류하여 충주로 들어갔다.

같은 날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번대는 동래에서 김해로 침입하여 경상우도를 따라 성주의 무계에서 지례, 금산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영동으로 나와 청주 방면으로 침입하였다.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시마즈 요시히로[島津貴久]가 이끄는 제4번대는 김해에서 제3번대와 함께 창녕을 점령한 뒤 성주, 개령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향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충주 방면의 중로를 방어하도록 하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에 임명하여 죽령·충주 방면의 좌로를 방어하게 하였으며,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추풍령·청주·죽산 방면의 서로를 담당하게 하였다.

한편, 이일 등이 내려가기에 앞서 경상감사 김수(金晬)는 일본군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각 읍에 공문을 보내어 각자 소속 군사를 인솔하고 안정한 지역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순변사가 여러 날이 지나도 당도하지 않아 결국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일본군에게 붕괴되었다.

수령들은 할 수 없이 순변사가 있다는 문경으로 갔으나 이미 비어 있으므로 상주까지 갔는데, 목사 김해(金澥)는 산속으로 숨어 버리고 판관 권길(權吉)만이 읍을 지키고 있었다. 이일은 이때서야 상주에 도착하여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전세를 갖추었으나 고니시 군(軍)의 급습으로 대패하였다. 이일은 홀로 탈주하여 충주에 있는 신립(申砬)의 부대로 갔지만, 여기에서도 패하여 또 다시 탈주하였다.

결국 전쟁 초기 경상도에서 일본군을 막지 못함으로써 일본군은 빠른 속도로 북상하여 서울을 점령하였고, 이어 황해도와 함경도 쪽으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6월 이후 8도 전역에서 의병과 의승군(義僧軍)이 봉기하여 무능한 관군을 대신하여 일본군을 격파하고, 바다에서는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화의 결렬과 2차 침입]

전쟁이 장기화되자 명나라와 일본은 화의 교섭에 들어갔다. 심유경(沈惟敬)이 일본군과 같이 도요토미의 본영에 들어간 뒤 2~3년간 사신이 왕래하였으나 화의는 결렬되었다. 도요토미는 명나라에 대하여 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보낼 것, 감합인[勘合印, 무역증인(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고, 붙잡아 갔던 임해군순화군을 돌려보냈다.

심유경은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고 판단하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封貢案)을 내세워 명나라의 허가를 얻었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이에 분노하여 화의가 결렬되고 2차 침입을 함으로써 정유재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1597년 1월 15일 가토·고니시 등이 1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상륙한 데 이어 3월 중순부터는 임진왜란 때 침입했던 대부분의 장수들이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와 동래·기장·울산 등 각지를 점령하고, 웅천·김해·진주·사천·곤양 등지를 왕래하였다. 이때 전라좌수사겸통제사인 원균은 일본군의 전술에 말려서 패사하였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崔湖), 군수 안홍국(安弘國) 등도 모두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남원·전주·안음 등을 점령하고 북상하였으나, 명군(明軍)과 양호 등에 의해 차단되었다. 또한 원균이 패사한 뒤 다시 통제사로 기용된 이순신이 명량대첩으로 일본군의 서진도 봉쇄하였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일본군은 총퇴각에 들어갔는데, 이순신은 퇴각하려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명의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과 합세하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함으로써 임진왜란 최후의 노량해전에서 승리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로써 7년간의 전쟁은 끝났고, 1599년 명군도 철수하였다.

[경상도 지역 의병의 활동]

조선의 관군이 일본군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국에서 의병이 속속 조직되었다. 의병의 신분은 양반에서 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고, 계급이나 신분의 차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은 대개 전직 관원으로 문반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고, 지방에서 추앙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의병장들은 대체로 자기가 자란 고장이나 지방관으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어서 그곳 지방민들이 잘 따를 수 있는 곳을 택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민족적 저항 의식이었고, 이를 촉발시킨 것이 의병장이었다. 유교의 도덕적 교훈인 근왕정신(勤王精神)이 오랜 유학 교육을 통하여 깊이 뿌리를 박은 것도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로 보인다.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는 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 권응수(權應銖), 김해(金垓)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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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 경상도 지역에서 발생한 주요 전투

[안동 지역의 의병 활동]

안동진은 안동을 비롯하여 예안·군위·의성·비안·봉화·영주·풍기·청송·진보·영해·영덕 등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진관 체제상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문화적 또는 학문적으로도 안동 문화권에 속한 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경상북도 북부에 있어 서울로 가는 길목에서 벗어나 있음으로써 일본군의 직접적인 피해를 상대적으로 적게 입은 지역이다.

안동 권역에서 일본군의 침략 소식을 접한 것은 동래가 함락된 4월 15일 관보를 통해서였다. 동래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민심은 흉흉하고 관리들은 도망하기에 급급하였다. 더욱이 상주가 함락되고 선조가 서울을 떠나면서 민심의 동요는 더욱 심해졌다.

일본군이 연전연승하면서 북상하자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안동 지역에서는 배용길(裵龍吉)이 일본군이 물러난 후에 현감의 공문을 가지고 임하현 구린촌에서 군사를 일으켜 200여 명을 얻은 것이 최초인데 실제 의병이라기보다는 관군에 가까워서, 병사 박진안동부에 들어오자 배용길은 군사 200여 명을 즉시 넘겨주었다.

1.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예안

안동 인근에서 의병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은 예안이었다. 그 이유는 현감 신지제(申之悌)가 일본군의 침략 소식을 듣고도 관아를 끝까지 지켜서 사민이 비교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6월에 들면서 배용길김용(金涌)을 찾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논의하였는데, 이때 마침 안집사 김륵(金玏)이 예안을 방문하여 격문을 돌리고 선비들과 만나 군사를 일으킬 것을 상의하였다.

상의 결과 현감을 중심으로 군정을 징발하고자 했으나 군부(軍簿)가 쓸모없게 되어 각기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군정을 모으기로 하였다. 6월 11일에는 예안의 사림이 모여 김해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진사 이숙량(李叔樑)에게는 글을 맡기고, 생원 김응훈(金應壎)을 도총사(都總使)로 삼아 여러 읍에 포고하여 토적을 위해 창의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전 군수 조목(趙穆)과 전 현감 김응협(金應夾)·김부륜(金富倫) 등은 쌀을 내어 군량으로 쓰도록 하였다.

이때 작성된 「논고열읍포고문(論告列邑布告文)」에는 의병이 일어나게 된 사정과 목적의 일단이 잘 드러나 있다. 즉 백성들이 의탁해야 할 수령과 방백이 먼저 도망친 뒤 고향을 적으로부터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의병은 조직하였으되 구체적인 활동은 전개하지 못하였다.

2. 의병 조직의 본격화

안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의병이 조직된 시기는 경상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꽤 늦은 편이었다. 그것은 이들 지역이 일본군의 피해를 크게 입지 않아서 가족과 가산을 보전할 수 있었으므로 의병을 일으켜 도리어 화를 자초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의병 조직에 소극적인 안동 권역 사족들을 적극적으로 의병 대열에 나오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의 초유문(招諭文)과 안집사 김륵의 활동 때문으로, 이후부터는 예안·안동을 중심으로 한 의병의 창기가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의병의 조직이 쉽지 않았고, 의병이 조직되었다 하더라도 그 세력은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역 간의 연대가 절실하였다. 소수의 의병으로 효과적인 활동을 위한 지역 간 연대의 논의는 자연스럽게 확산되고 있었다. 7월 15일에 의성과 의흥 출신인 우경충(禹景忠)과 박연(朴淵)이 안동과 주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의병 연대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7월 18일경에는 예안과 안동에서 각각 김해배용길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3. 안동별읍향병의 창설

7월 20일에는 마침내 안동을 비롯하여 예안·의성·의흥·군위 등지의 사림이 일직에 모여 승문원정자 김해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정백(李庭栢)배용길을 각각 좌부장과 우부장으로 삼하 안동별읍향병(安東別邑鄕兵)이라는 연합 의병 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안동을 본진으로 삼아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안동향병은 상대적으로 늦게 조직되었지만 경상도 북부 지역 대부분의 의병을 망라하는 의병 연합체로서 합동 작전을 수행하거나 다른 지역 의병과 공동 작전도 활발하게 수행하였다.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 지역의 각지에서 활동한 안동향병은 관군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였고, 명군의 남하와 일본군의 퇴각과 더불어 활동 근거지를 밀양·진주·경주 등지로 옮겼다.

그러나 활동 양상은 다른 의병과 마찬가지로 매복이나 야습, 소규모의 적을 상대로 한 게릴라식 전투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안동향병이 경상도 북부 지역의 연합체이면서도 실제 활동은 독자적으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상세한 활동의 내용은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안동향병장이 경상좌도 의병을 절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

경상도는 임진왜란의 피해가 가장 큰 지역이었다. 일본군의 주요 침입로가 경상도 쪽에 집중되었고, 관군들이 초기 진압에 실패하면서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경상도 지역 의병들의 활동으로 차츰 전세가 조선에 유리하게 진행되었지만 전쟁은 장기전 양상을 띠었다.

경상도 지역의 관군과 백성, 의병들의 활약은 전란의 피해를 막고 일본군을 무력화하여 전쟁을 종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기존의 정치, 경제, 군사, 신분 제도 등이 동요하였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고, 중국에서는 명이 망하고 청 왕조가 들어서는 등 동아시아 국제 정세도 크게 변화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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