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3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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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院君奉還萬人疏 |
영어의미역 | Ten-thousand Persons' Memorial to Returen Regent Heungseon Daewon-gu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진영 |
[정의]
조선 후기 안동을 비롯한 영남 유생들이 고종에게 대원군의 봉환(奉還)을 요구한 상소 운동.
[개설]
대원군 봉환 만인소는 1873년(고종 10) 고종의 친정 체제 구축과 함께 은거하고 있던 대원군이 병인양요 후에 설치되었던 강화 진무영 폐지 등에 대한 불만으로 양주 직곡으로 거처를 옮기자 안동을 비롯한 영남의 유생 1만여 명이 1875년(고종 13) 2월부터 6월까지 4차례에 걸쳐 고종에게 대원군의 봉환을 요구한 상소 운동이다. 대원군 봉환 만인소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유생은 영남 23개 고을에서 105명이었다. 안동에서는 12명, 예안에서는 16명이 소수 혹은 소임 등으로 적극 참여하였다.
[역사적 배경]
1873년 동부승지인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를 계기로 친정을 결심한 고종은 이듬해부터 구체적인 친정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이를 위하여 무위소를 신설하여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군사를 소속시키고, 대원군 때 훼철된 만동묘(萬東廟)를 다시 세우며, 병인양요 후에 설치된 강화 진무영을 폐지하였다. 또한 이최응(李最應)과 김병국(金炳國)을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
최익현의 상소 이후 물러나 있던 대원군은 강화 진무영이 폐지되자, 불가함을 극력 주장하다가 양주 직곡으로 은거해 버렸다. 이로써 전국의 여론이 들끓었는데, 이에 따라 영남에서도 퇴계 이황과 서애 류성룡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대원군의 봉환을 요청하는 상소 운동이 추진되었다.
[경과]
대원군 봉환을 요청하는 상소 운동이 본격화한 때는 1874년(고종 11) 10월 25일 안동의 숭보당(崇報堂)에서 도회(道會)가 열리면서부터였다. 숭보당도회에는 250여 명의 유생이 모여 상주의 정민채(鄭民采)를 소수(疏首)로 선출하고, 11월 20일 문경 유곡에서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발행하기도 전에 소수와 안동의 이중린(李中麟) 등이 안동부에 구금되었다.
이에 유생들은 다시 이중진(李中振)을 소수로 뽑아 상소 운동을 추진하였다. 12월 8일 서울에 도착한 소유들은 봉환 요청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다가 사퇴한 이중진을 대신하여 류도수(柳道洙)를 소수로 뽑아 1875년(고종 12) 3월 3일 복합(伏閤)이 시작되어 5일에 봉입이 되었다. 그러나 곧 소수 등을 길주·갑산 등지에 유배하라는 처분이 내렸다. 이후 2차, 3차 상소가 계속되었으나 봉소(奉疏)하기도 전에 역시 유배 처분이 내려졌다.
4차 상소에서는 영남 유생뿐만 아니라 호남, 관서, 황해 유생 등이 가담함으로써 5도 유생 1,000여 명이 복합에 들어갔다. 이후 전라도, 함경도 유생들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소유들의 복합은 6월 18일까지 계속되었다. 유생들의 복합이 계속되자 고종은 마침내 소수들을 하옥하고, 곧 처참할 것을 명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22일 밤 대원군이 스스로 돌아옴으로써 소수들은 가까스로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결과]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생들의 대원군 봉환 만인소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것은 곧 고종 친정 세력의 승리이자, 대원군 세력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대원군 세력에 대한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다. 영남 혹은 남인의 후원 세력이었던 판금오당상인 이승보(李承輔)에 대한 탄핵과 채동술(蔡東述)·권정호(權鼎鎬) 등에 대한 유배 등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