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415
한자 歷史
영어공식명칭 History
분야 역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종원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의 역사에 대한 개관.

[아산의 명칭유래]

충청남도 아산은 조선 초에 온양군·신창현·아산현으로 편제되어 충청도관찰사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아산현은 고려 때 아주를 1413년(태종 13)에 개칭한 것이다. 1459년(세조 5)에 현을 줄여서 온양·평택·신창 등 세 고을에 나누어 붙였다가 1465년에 다시 복구되었으며, 1505년(연산군 11)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중종 초에 다시 충청도로 옮겨졌다. 1895년(고종 32)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 337개 군으로 개편하면서 온양군·신창군·아산군으로 개칭하였으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 이들 3개 군을 통합하여 아산군으로 하였다. 1986년에 온양읍이 온양시로 승격되어 아산군과 분리되었다가 1995년 다시 통합하여 아산시가 되었다.

[선사시대]

충청남도 아산시의 역사는 선사시대(先史時代)와 역사시대(歷史時代)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 선사시대는 구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로 유적과 유물을 통해 파악된다. 구석기시대 유적으로는 권곡동유적, 실옥동유적, 명암리 밖지므레유적, 용두리유적, 연화동유적 등이 있으며, 몸돌을 비롯해 격지·여러면석기·긁개·밀개 등이 출토되었다. 시기는 대부분 1만 년~3만 5천 년 전의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한다.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풍기동유적, 성내리유적, 장재리 안강골유적, 용화동 가재골유적, 용두리 부기리유적, 백암리 점배골유적 등에서 주거지와 수혈 등이 확인되었으며, 유물로는 빗살무늬토기·갈돌·갈판·숫돌·방추차·돌도끼·돌보습 등이 출토되었다. 유적 조성 시기는 주로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에 해당한다.

아산 지역은 곡교천삽교천을 중심으로 저구릉성 산지가 발달되어 있어 농경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 유적은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다수가 분포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명암리유적, 명암리 밖지므레유적, 남성리유적, 와우리유적, 풍기동유적 등을 들 수 있으며, 유물로는 토기류를 비롯해 돌도끼·돌끌·돌화살촉·갈돌·토제방추차·어망추 등이 있다. 이들 주거지는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는데, 전기의 수렵과 어로 중심에서 경작 중심의 생계 방식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철기시대 유적으로는 남성리 석관묘, 백암리유적, 궁평리유적, 대추리유적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를 비롯해 흑도장경호·석촉 등이 출토되었다. 유적과 유물의 사례가 적어 아산 지역 철기시대의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발달된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큰 규모의 정치체(政治體)[정치적으로 구성된 조직으로 이뤄진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시대로의 이행은 원삼국시대[삼한시대]부터이며, 이때 아산 지역은 마한 연맹체에 편제되어 있었다. 마한 연맹체는 모두 54개의 소국(小國)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아산 지역에는 염로국(冉路國) 또는 신흔국(臣釁國)이 자리하였을 것으로 비정(比定)된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갈매리유적을 비롯해 명암리 밖지므레유적, 진터유적 등이 있다. 특히 밖지므레유적에서 토광묘 81기를 비롯하여 주구토광묘 70기, 옹관묘 7기 등이 확인되었는데, 시기는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말로 추정된다. 그리고 유물 가운데 원통형 토기를 비롯하여 다수의 철기류와 장신구류가 출토되어 마한의 유력한 소국이 존재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목지국(目支國)의 중심지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백제시대]

백제시대에는 탕정군(湯井郡)을 비롯하여 그 영현(領縣)인 아술현(牙述縣), 굴직현(屈直縣)의 3개 군·현이 두어졌다. 백제는 사비기에 방군성제(方郡城制)를 실시하였는데, 성(城)이 현(縣)과 같은 것으로 파악된다. 탕정군은 아산시 중심 지역으로 추정되며, 읍내동산성이 치소(治所)였을 것으로 비정된다. 아술현영인면 일대, 굴직현신창면 일대에 비정된다. 아산 지역이 백제로 편제된 시기는 『삼국사기』「백제본기(百濟本記)」에 따르면, 온조왕 36년[서기 18년]이지만, 대개 3세기경으로 이해된다.

[신라시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671년(문무왕 11)에는 탕정군탕정주로 승격하여 총관을 두었다가 다시 군으로 하였다. 아술현은 757년(경덕왕 16)에 음봉현[또는 음잠현]으로, 굴직현기량현으로 고쳐서 탕정군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시대]

고려 초에는 태조가 918년에 김행도를 아산에 파견하고 928년에는 유금필을 시켜 탕정군에 성을 쌓았는데, 아산 지역을 후삼국 통일의 중요한 전초기지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어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탕정군온수군(溫水郡)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천안부에 편제하였다가 1172년(명종 2) 현으로 낮추어 감무(監務)를 두었다. 음봉현은 940년에 인주(仁州)로 고치고 995년(성종 14)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곧 없앴으며, 1018년(현종 9) 천안부에 편제하였다가 뒤에 아주(牙州)로 고쳐 감무를 두었다. 기량현은 940년(태조 23)에 신창현으로 고쳤다. 몽골 침략기에는 1236년(고종 23)과 1256년(고종 43) 두 차례에 걸쳐 아산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진 바 있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출몰이 잦았다. 1352년(공민왕 원년) 풍도에 왜구가 출몰하였으며, 1369년(공민왕 18)에는 왜선을 나포한 사례가 확인된다. 우왕 3년, 4년에도 왜구가 아산 지역을 노략질하여 큰 피해가 있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아산은 온양군, 신창현, 아산현으로 편제되어 충청도관찰사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온양군은 1414년(태종 14)에 온수를 신창과 합하여 온창현(溫昌縣)으로 하였다가 1416년(태종 16)에 다시 나누었고, 1442년 세종이 온천을 다녀온 후 온수현을 지금의 명칭인 온양으로 고쳐 군으로 승격하였다. 신창현은 1414년에 온수에 합쳐졌다가 1416년에 다시 분리되어 신창현을 두게 되었다. 아산현은 1459년(세조 5)에 현을 줄여서 온양·평택·신창 등 3개 고을에 나누어 붙였다가 1465년에 다시 복구되었으며, 1505년(연산군 11)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중종 초에 다시 충청도로 옮겨졌다.

세종 때 아산에는 공세관(貢稅官)이 전국 8개 수조처(收租處)의 하나로 설치되었다가 이후 세조 때에는 전국 9조창(漕倉)의 하나였던 공세관창(貢稅官倉)을 설치해 인근 40개 고을의 조세를 운반하였다. 1578년(선조 11)에는 토정 이지함이 아산현감으로 부임하였으며,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걸인들을 구제하고 노약자와 굶주린 사람들을 구호하였다. 그리고 온양온천에 행차하였던 왕으로, 세종·세조·현종·숙종·영조·정조 등이 확인되며, 왕 외에도 왕실 종친 등이 다수 다녀갔다. 이는 온양이 왕실 온천이었음을 보여 주며, 온행(溫行)을 위한 행궁(行宮)이 조영되었다. 임진왜란 시기에 아산 지역은 왜적의 침략을 직접 받지는 않았으나, 아산 출신의 이순신 장군은 해전에서 왜군을 격퇴함으로써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하였다.

[근대]

아산시는 1895년 홍주부에 속한 온양군·아산군·신창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 3개 군을 통합하여 아산군으로 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아산 지역에서는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각 지역에서 4월 초까지 전개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7회에 걸쳐 약 5천여 명이 참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아산 지역은 지리적 위치로 인해 다른 지역보다 경제적 침탈이 많았으며, 객주와 도매상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1922년에는 충남선[현재 장항선] 철도의 개통으로 온양온천역이 개설되었으며, 이후 5개의 역이 아산 지역에 설치됨으로써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현대]

1945년 광복과 함께 아산 지역에도 미군이 진주하여 지금의 온양관광호텔[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59]에 주둔지를 두고 군정을 시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아산 지역민들의 자치활동이 있었으며, 이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까지 이어졌다. 1950년 6·25전쟁의 발발로 7월에 북한군이 진주하여 3개월간 북한군이 점령하였으며, 의용군 징집, 식량 수탈, 유력 인사의 처형 등 많은 희생이 있었다. 이후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정부의 경제 성장 정책으로 아산 지역에도 산업화의 물결이 일었으며, 1990년대에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비롯하여 많은 기업이 들어서면서 첨단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행정조직은 1986년에 온양읍이 온양시로 승격되어 아산군과 분리되었다가 1995년 다시 아산시로 통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관련 기록]

충청남도 아산의 역사 관련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 권 23 온조왕 36년에는, "7월에 탕정성을 쌓고 대두성의 민호를 나누어 옮겨 살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 권 23 세가 23 고종 23년 9월 기록에는 "9월 정사 몽골군이 온수군(溫水郡)을 포위하니 군의 향리[郡吏]인 현려(玄呂)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워 적을 대파하고 머리 2급(級)을 베었다. 화살과 돌에 맞아 죽은 자가 200여 인이고 노획한 병장기[兵仗]가 매우 많았다. 왕이 온수군의 성황신(城隍神)이 은밀히 도운[密祐] 공이 있다고 하여 성황신에게 존호를 더하여 주고 현려는 군(郡)의 호장(戶長)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 권 38 세가 38 공민왕 원년 9월의 기록에는 "포왜사 김휘남이 25척 선단으로 왜구를 막는데, 풍도에서 적선 20척을 만나 싸우지 않고 물러나 교동에 이르렀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고려사』 권 41 세가 41 공민왕 18년 11월을 살펴보면, "아주에서 왜선 세 척을 나포하고 수급(首級) 두 건을 바쳤다"라고 아산과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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