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417
한자 日帝强占期
영어공식명칭 Japanese Colonial Period
이칭/별칭 일제시대,대일항쟁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형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0년 8월 29일 - 경술국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8월 15일 - 8·15광복

[정의]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1945년 8·15광복에 이르기까지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배와 지역민에 의한 독립운동이 다양한 분야에서 전개된 시기.

[개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는 일반적으로 1910년대의 무단 통치기, 1920년대의 문화 정치기, 1930년대 이후부터 1945년 일제 패망까지의 민족 말살 통치기 등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일제는 사회·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하는 악랄한 정책을 집행하였다.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도 온양의 유흥 도시화, 식민지 농업정책 전방위적 시행, 군국주의(軍國主義)의 확대와 함께 물질적·정신적 억압이 동일하게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동안 아산 지역민들은 3·1운동, 현충사 중건 운동, 천도교멸왜기도운동, 형평사 운동,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 등 일제 패망 시기까지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아산 지역의 식민지배]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한 중앙관제(中央官制) 제정과 함께 1914년 지방제도 개편에 나섰다. 이 결과 아산, 온양, 신창 3개 군(郡)이 아산군으로 통합되었고, 온양 일대가 일본인의 거류지가 되었다. 온양은 아산군청, 온양경찰서, 공주지방법원 온양출장소 등이 설치되면서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1922년 충남선[지금의 장항선]의 일부 구간인 천안-온양 사이가 개통되면서 관광과 물류 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나아가 1926년 경남철도주식회사(京南鐵道株式會社)가 온양온천 운영권을 인수한 뒤, 휴양시설인 신정관(神井館)을 신축하면서 온양의 소비 유흥 도시화를 이끌었다.

당시 아산 내 대부분의 지역은 여전히 농업생산에 의존하고 있었다. 아산농회(牙山農會), 온양수리조합, 도고수리조합, 아산금융조합 등 각종 공공단체와 조합은 지역민으로부터 더 많은 원료 이익을 얻기 위해 지주(地主) 경영 등 식민지 농업정책을 전방위적으로 시행하였다. 1930년대의 소작 관행(小作慣行)을 조사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아산 지역은 충청남도나 전국 평균에 비해 춘궁(春窮) 상태에 있는 순소작농의 비율이 매우 높게 집계되었다. 따라서 소비 향락을 위한 도시화의 진전과 농촌 수탈이 함께 이루어졌다.

1930년대 중·후반 일제의 대륙 침략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군국주의의 확대와 함께 물질적·정신적 억압은 아산 지역에서도 진행되었다. 송악면 유곡리 봉곡사(鳳谷寺)에는 ‘천년의 숲길’이 있다. 그런데 진입로부터 사찰 입구까지 500여m 길이에 있는 수백 그루 소나무는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연료용 송진을 채취하려고 낸 V 자 모양의 상처가 있다. 1936년에는 영인면 아산리에 아산일청전적기념비(牙山日淸戰跡紀念碑)가 세워졌다. 친일 유지 류기영(柳冀暎) 등이 기성회(期成會)를 조직해 건설을 주도한 것이다. 또한 청일전쟁 관련 내용을 간략히 기록한 『아산전사(牙山戰史)』를 편찬하였다. 이는 전시체제기에 조직적으로 시행된 강제 동원의 일환이었다.

[아산 지역의 독립운동]

일제강점기 동안 아산 지역민은 독립운동을 위해 국내외 각지로 떠나거나 아산에 머물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국권회복운동으로서 의병 운동을 계승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조직에 참여하였고,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의 처단에 앞장섰다. 또한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소식을 전해 듣고 만세 시위를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아산군 내 거의 모든 면에서 만세 시위, 횃불 시위 등의 다양한 형태로 일어났으며 4월 4일 선장면 만세운동이 절정을 이루었다. 주모자 중 한 명인 최병수(崔炳洙)는 일제 헌병의 발포로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1920년대에는 민립대학기성회 아산지방부, 형평사(衡平社) 아산지사, 재만동포옹호동맹 등이 지역 내에서 조직되면서 민족운동·사회운동을 발전시킬 토대를 형성하였다. 1930년대에는 아산농민조합을 건설하여 농민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났다. 또한 수리조합 설치가 지역 중소지주들에게 조합비 부담을 전가하는 등 폐해가 나타나자 반대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독립운동을 후원하느라고 어려워진 이순신 종가의 위토를 지키고, 현충사(顯忠祠) 재건을 추진한 ‘이충무공 유적 보존 운동’이 전국적 차원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일제 말기에는 천도교단의 조직적 움직임 아래 일제 패망을 염원하는 기도문 보급 운동인 멸왜기도운동(滅倭祈禱運動)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이처럼 아산 지역의 독립운동3·1운동 이후 일제 패망 시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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