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348
한자 百濟時代
영어공식명칭 Baekje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강종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기원전 18년 - 백제 건국
특기 사항 시기/일시 660년 - 백제 멸망

[정의]

기원전 18년부터 660년 멸망할 때까지 고대 삼국의 하나였던 백제의 충청남도 아산 지역 진출 과정과 지방통치체제.

[개설]

충청남도 아산 지역은 삼한시대 마한(馬韓) 연맹체의 맹주국이었던 목지국(目支國)[월지국(月支國)]의 멸망 과정에서 백제(百濟)에 편제되었으며, 편제된 시기는 고이왕 대[재위 234~286]로 비정된다. 475년(개로왕 21) 웅진(熊津)천도로 인해 아산 지역은 관방(關防) 체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사비 도읍기(泗沘都邑期)에는 지방통치체제인 방군성(方郡城)에 편제되었으며 탕정군(湯井郡)아술현(牙述縣), 굴직현(屈直縣) 등 1군 2현이 두어졌다.

[형성 및 변천]

1. 개설

백제는 기원전 18년 부여족 계통인 온조(溫祚) 집단에 의해 지금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 4세기 중반에는 북으로 황해도에서부터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일대를 영역으로 편제하였다. 그러나 660년(의자왕 20) 나당군(羅唐軍)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3년간 치열한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실패하였다. 678년 동안 존속한 백제 역사의 전개 과정은 수도 변천을 중심으로 한성(漢城) 도읍기, 웅진 도읍기, 사비 도읍기로 구분할 수 있다.

2. 형성

아산 지역이 백제에 편입된 시기는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 따르면 온조왕 대로 확인된다. 8년(온조왕 26)에 마한을 습격하여 국토를 병합하였고, 이듬해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을 함락한 후 그 지역에 대두산성(大豆山城)[대두성(大豆城)]을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18년(온조왕 36)에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의 민호(民戶)를 나누어 옮겨 살게 하였다. 대두산성마한의 옛 땅을 지배하기 위해 축조한 치소(治所)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대두산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산시 음봉면 수한산성(水漢山城) 또는 영인면 영인산성(靈仁山城) 등에 비정하는 견해나 공주시나 세종특별자치시 등에 비정하는 견해 등이 있지만, 온양과 가까운 아산 지역에 비정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리고 탕정성읍내동산성(邑內洞山城)에 비정되기도 한다.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의 한전(韓傳)에는 3세기 중엽까지 마한의 여러 소국의 존재가 보이고 있어 온조왕 대에 마한 병합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온조왕 대의 마한 통합 관련 기록의 시기를 조정해서 이해하고 있는데, 고이왕 대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246년(고이왕 13) 한(韓) 세력과 중국 군현(郡縣) 세력과의 충돌로 마한 연맹체가 해체되었고, 백제가 등장하면서 결국 백제가 마한 연맹체의 맹주국인 목지국을 복속하였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260년(고이왕 27) 좌평제의 실시와 관등제의 마련, 261년(고이왕 28) 왕의 복식 정비와 남당 정치(南堂政治)의 실시, 262년(고이왕 29) 각종 법령의 제정 등은 마한의 병합에 따른 새로운 정국의 변화 속에서 나타난 정치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변천

백제로 편입된 이후 아산 지역에는 성이 축조되고 중앙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탕정성이 축조된 사실이 확인되고, 25년(온조왕 43) 왕이 아산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지방관이 중앙에서 파견되었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지방관으로 도사(道使)의 존재가 확인되지만 모든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 지역에만 지방관을 파견하고 일부 지역은 재지(在地) 세력들을 지방관에 임명하여 행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아산 지역의 경우 재지 세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은 아직 조사된 바 없지만 천안 용원리유적, 공주 수촌리유적, 서산 부장리 분구묘(墳丘墓)[분구를 먼저 조성한 다음 그 안에 매장시설을 설치하는 무덤] 등의 사례를 통해 볼 때 백제의 영역에 편제된 이후에도 재지 세력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산 지역의 지리적 중요성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 크게 증대되었다.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한 이듬해인 476년(문주왕 2) 봄 2월에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478년(삼근왕 2)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가 은솔(恩率) 연신(燕信)과 함께 무리를 모아 대두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479년(삼근왕 3) 대두성은 두곡으로 옮겨졌다. 두곡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해구의 반란에 참여한 죄로 원래의 대두성 지역은 행정 치소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 군현 체제

백제시대 아산 지역의 행정명이 확인되는 것은 탕정군아술현(牙述縣), 굴직현 등이다. 백제시대 지방제도가 군현 체제로 운영된 것은 사비 도읍기이다. 따라서 이들 행정명이 사용된 시기는 사비 도읍기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조(地理條)를 보면 아산에는 탕정군아술현, 굴직현 등 1군 2현이 있었다. 탕정군은 아산의 중심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치소는 탕정성으로 비정되는 읍내동산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아술현영인면 일대, 굴직현신창면 일대에 비정된다. 이들 군현에는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아산 지역은 사비 도읍기에 고구려와의 군사적 긴장 관계가 높았던 지역으로 국방상 요충지였다. 그렇지만 문헌자료를 통해 당시의 역사적 실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다만 고고학적인 연구 성과를 통해 문화상을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다.

[백제시대 유적과 유물]

백제시대 유적으로는 주거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외에도 생산 유적인 가마와 공방 시설, 무덤[분묘(墳墓)] 유적 등이 확인되었다.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풍기동 밤줄길유적에서는 주거지 1기와 기와 가마 2기, 구덩이 모양의 집터[수혈 유구(竪穴遺構)] 등이 확인되었고, 갈매리유적에서는 주거지를 비롯한 생활 관련 유적, 명암리유적에서는 무덤 자취가 확인되었다. 신법리유적에서는 주거지 2기, 독무덤[옹관묘(甕棺墓)] 2기가 확인되었으며, 초사동고분군에서도 주거지 2기, 돌방무덤[석실분(石室墳)] 2기, 독무덤 2기가 확인되었다.

유물로는 토기류, 철기류, 석기류 등이 발견되었으며, 이 외에도 가락바퀴[방추차(紡錘車)], 두들개[박자(拍子)], 아궁이 틀, 진흙 틀[구슬용범], 옥, 목제 유물, 동식물 유체 등 다양하다. 시기는 3세기 말에서 한성 백제기로 비정된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의 유적은 원삼국시대로 편년되지만 아산 지역의 백제 편제 시기가 3세기 말경으로 추정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 유적은 백제로 편년해도 무방하다.

특히 갈매리유적에서는 구덩이 모양의 주거지를 비롯해 굴립주 건물지(掘立柱建物址)[기둥을 땅에 박은 건물], 구덩이 모양의 집터, 도랑 형태의 자취[구상 유구(溝狀遺構)], 독무덤, 철기 제작 관련 추정 공방 등 다양한 유형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또한 부뚜막이 시설된 육각형 구덩이 모양의 주거지는 한성 지역에서 확인되는 주거지 형태로는 처음 조사되었다는 점에서 한성 지역과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들 유적을 통해 아산의 각 지역에서 생산활동과 거주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탕정’이라는 명칭이 백제 초기부터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온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불교도 수용되어 지역에서 신앙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창면 읍내리인취사염치읍 산양리세심사 등이 삼국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권23 온조왕 26년에 "겨울 10월 왕이 군사를 출동시키면서 거짓 사냥을 하러 간다고 말하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국토를 병합하였는데, 다만 원산과 금현 두 성만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온조왕 36년에 "7월에 탕정성을 쌓고 대두성의 민호를 나누어 옮겨 살게 하였다.", 온조왕 43년에 "가을 8월에 왕이 아산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라고 각각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36 잡지5 지리3에는 "탕정군은 본래 백제의 군이었는데, 문무왕 11년 당나라 함형 2년[671년]에 주(州)로 삼고 총관(摠管)을 두었다가 함형 12년[681년]에 주를 폐지하고 군으로 삼았다. 경덕왕이 그대로 썼는데, 지금의 온수군(溫水郡)이다. 영현이 둘이다. 음봉현(陰峯縣)[또는 음잠(陰岑)이라고도 한다.]은 본래 백제 아술현으로 불렸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의 아주(牙州)이다. 기량현(祁梁縣)은 본래 백제 굴직현(屈直縣)으로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의 신창현(新昌縣)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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