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456
한자 六二五戰爭
영어공식명칭 Korean War
이칭/별칭 한국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홍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연표보기 - 북한 인민군 침공, 6·25전쟁 발발
전개 시기/일시 1950년 7월 7일 - 북한 인민군 6사단 중대 병력 아산군 둔포면 일원 진입, 음봉지서 공격, 좌익 인사 주요 기관 및 단체 장악
전개 시기/일시 1950년 7월 8일 - 북한 인민군 6사단 온양읍내 진입
전개 시기/일시 1950년 7월 9일 - 북한 인민군 6사단 1개 부대 송악·유구 방면으로 진출
전개 시기/일시 1950년 7월 10일 - 북한 인민군 6사단 1개 부대 신창·예산 방면으로 진출, 신창 한티고개 전투에서 경찰 패퇴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4일 - 아산군 전체에서 인민재판 실시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20일 - 온양중학교 교사 및 학생 중심의 반공 단체인 태극동맹 발각, 체포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26일 - 태극동맹원 6명 학살당함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26일 - 국군 및 유엔군 대전·조치원 등 수복, 아산 지역 북한 인민군 및 노동당 간부 피신, 반공 인사들이 주요 기관 및 단체 수복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26일~30일 - 북한 인민군 패잔병 및 좌익 인사들의 민간인 학살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29일 - 국군 및 유엔군 아산 진입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말~10월 - 경찰 및 반공 인사들의 부역자 처단 명목의 민간인 학살
전개 시기/일시 1950년 12월 - 내무부에서 온양읍을 전쟁 중 피난지의 한 곳으로 지정
전개 시기/일시 1951년 1월 중순 - 1·4후퇴로 피난민 유입, 경찰 및 반공 인사들의 부역자 예비검속 명목의 민간인 학살
전개 시기/일시 1951년 4월~5월 - 탕정면 모종리에 피난민 수용소 설치
종결 시기/일시 1953년 7월 27일 - 휴전 성립
발생|시작 장소 온양경찰서 음봉지서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음봉면로 19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신정관 - 충청남도 아산시 시민로 385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신창면 한티고개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산30번지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모종리 피난민 수용소 - 충청남도 아산시 모종동 588 지도보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온양경찰서|태극동맹|호국동지회

[정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침공으로 충청남도 아산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

[역사적 배경]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 후 북한 인민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7일 아산에 진입하여 9월 말까지 전 지역을 점령하였다. 9월 29일 국군과 유엔군이 아산 지역을 수복하였고, 이후로는 북한 인민군의 침입을 더 이상 받지 않았다. 전쟁 기간 동안 아산 지역은 전쟁의 중심지역에서는 벗어나 있었으므로 물적 피해는 그렇게 크지 않았으나 좌익 세력들의 우익 인사 학살 사건, 반공 세력들의 부역자 처단 등으로 안타까운 인적 피해가 있었다.

[경과]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 인민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6일 천안까지 내려왔다. 북한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참전한 미군은 7월 8일까지 이틀 간 천안에서 북한 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미군은 천안에 방어선을 구축함과 동시에 주변의 남하 루트를 차단하였다. 아산 지역에서는 7월 6일 배방면 봉강교와 온양읍 온천교를 폭파하여 천안에서 온양으로의 진입을 차단하였다.

북한 인민군의 아산 지역 진입은 7월 7일 시작되었다. 7월 7일 오전 북한 인민군 제6사단 병력이 평택에서 둔포를 거쳐 온양경찰서 음봉지서를 습격하였다. 다음 날인 7월 8일에는 온양읍내에 진입하였고, 7월 9일에는 일부 병력이 송악을 거쳐 유구로, 7월 10일에는 다른 병력이 신창을 거쳐 예산으로 향하였다. 이 과정에서 온양경찰서 경찰을 중심으로 한 온양, 예산, 당진 경찰 연합 병력이 북한 인민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신창면도고면의 경계인 한티고개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북한 인민군의 막강한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북한 인민군이 아산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주요 기관과 단체는 좌익 인사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군·면 단위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온양경찰서는 온양내무서로 바뀌었다. 좌익 인사들은 북한 정치보위부의 지시를 받아 활동을 전개하였다. 공무원, 단체 간부, 지역 유지 등을 학살하였으며 군수물자 동원을 위해 현물을 강제로 거두거나 강제노역을 실시하였다. 또한 사상교육과 함께 보안대를 조직하고 마을 경비를 하도록 하였다. 의용군 모집을 구실로 청년 남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였다. 9월 4일에는 군 전체에서 인민재판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공 투쟁이 비밀리에 벌어졌는데, 태극동맹의 활동이 대표적이었다. 태극동맹은 비밀결사 조직으로서 북한 인민군에게 학살당할 사람들에게 미리 정보를 제공하거나, 북한 인민군의 현황을 파악하고 무기를 탈취할 계획을 세우는 등의 공작 활동을 펼쳤다. 그 밖에 호국동지회 등의 반공 단체도 만들어졌다.

1950년 9월 15일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내용은 라디오를 통해 아산 지역에도 전해졌으며, 작전 당시 불빛이 아산에 보이기도 하였다. 작전 성공 이후 보름 정도 되는 9월 29일 천안까지 올라온 유엔군이 아산 지역에 들어와 북한 인민군 병력을 몰아내고 수복하였다. 1950년 9월 말 유엔군의 수복 이후 북한 인민군은 더 이상 아산에 재침입하지 못했다. 중공군의 참전과 1951년 1·4후퇴의 상황 속에서도 오산 이남으로 내려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물적 피해와 인적 피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실제 주요 전투는 천안-대전 라인에서 전개되어 아산 지역의 물적 피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전쟁 초기 북한 인민군이 온양읍내에 진입하였을 때 미군 폭격기가 읍내를 폭격하여 철도호텔[현재 온양관광호텔] 경내가 파괴된 정도이다. 이 외에 북한 인민군 진입을 막기 위한 교량이나 도로 등의 파괴가 있었다.

한편, 유엔군의 아산 지역 수복을 전후한 시기에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수복 전에는 북한 인민군이 북쪽으로 후퇴하면서 지역민들을 학살하였다. 특히 도고면, 선장면, 신창면 등 후퇴 경로 주변의 민간인들이 많이 희생되었으며, 조사기관마다 다르지만 1952년 3월 말 공보처에서 발표한 『6·25사변 피살자 명부』에는 약 240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수복 이후에는 부역자 처단을 명목으로 한 반공 단체와 경찰 등의 기관에 의해 희생되었다. 배방면, 탕정면, 염치면의 주민들이 많이 희생되었으며, 신창면선장면에서도 희생자가 있었다. 1951년 1·4후퇴를 전후한 시기에는 예비 검속으로 인해 다시 한번 부역자 가족들이 희생당하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보고서에는 최소 800명이 희생되었다고 추산하고 있다.

아산 지역은 정부가 정한 주요 피난지 중 한 곳이었다. 특히 1951년 1·4후퇴 이후 피난민들이 많이 유입되었다. 이에 정부는 피난민 수용소 설치를 결정하였고, 아산에서는 온양읍내에서 가까운 탕정면 모종리에 피난민 수용소를 건립하였다.

[의의와 평가]

6·25전쟁을 통해 아산 지역은 물적 피해는 많지 않았지만 인적 피해를 겪었다. 좌익 세력과 반공 세력에게 학살당함으로써 발생한 것이었다. 학살사건은 지역민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 나타났으며, 아직도 그 긴장감이 없어지지 않은 곳도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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