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의 행복을 가득 담은 신정호 호수공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394
한자 市民-幸福-神井湖湖水公園
영어공식명칭 Shinjeong Lake Park Filled with Citizens’ Happiness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천경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7년 3월 - 신정호 준공
현 소재지 신정호 호수공원 - 충청남도 아산시 방축동 일원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방축동에 있는 인공호수에 조성된 호수공원.

[개설]

신정호의 공식 명칭은 마산저수지(馬山貯水池)이며 농업용 저수지로 일제강점기인 1927년 준공되었다. 같은 시기에 중건된 신정관이 위락시설로 이용되어 관광지로 각광을 받게 되면서 통칭 ‘신정호’라 불렸다. 1980년대 들어 관광지로서 침체되기 시작하자 여러 가지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종합 개발 사업을 추진하여 지금의 아름다운 호수공원으로 탈바꿈하였고 아산시민들로부터 사랑받는 공원이 되었다.

[신정호 축조 전의 상황]

신정호는 1927년에 농업용 저수지로 준공된 마산저수지의 통칭이다. 신정호가 위치한 곳은 충청남도 아산시 방축동 일원이며 오목천(烏木川)의 중류이다. 주변은 대략 남고북저 지형으로, 남쪽 지역은 동쪽부터 월라산[247m]~황산[347m]~금암산[318m]~보갑산[319m]~덕암산[260.5m]으로 동서 방향의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이 산줄기와 신정호 사이에는 낮은 산과 사이사이에 형성된 들판이 신정호 남쪽에 닿아 있다. 남남서에서 북북동 방향으로 길쭉한 신정호 동서 양쪽에는 온양 남산 산줄기와 치학산 남쪽 산줄기가 저수지와 대략 나란히 이어져 있다. 신정호 북쪽의 오목천 주변은 저지대 평야를 이룬다. 오목천덕암산 북쪽 신창면 창암리에서 발원하며 보갑산 북쪽 황산천 물을 받아들인 뒤 신정호 상류에서 황산 북쪽 초사천의 물을 받아 신정호를 이루며 다시 북쪽으로 흐르다 행목천 물을 추가로 받아들이고 흘러 곡교천에 합류한다.

신정호 주위에는 여러 마을이 있다. 제방 아래의 검은들[행정구역 개편 전의 방축2리], 저수지 동쪽의 희안리[전 방축3리], 동남쪽 세집매와 남쪽의 지라리·온양울바위[전 기산1리 일부], 남서쪽의 신창면 울바위[명암리, 전 창암리 일부], 서쪽의 점돌[전 점량리]과 북서쪽 마산리[전 득산2리 일부] 등이다. 오목천은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신창현온양군의 경계가 되었던 유로연장 7.1㎞의 지방하천이며, 오목천 서쪽에 있어 신창면에 속했던 점량리·득산리는 1983년에 온양읍에 편입되었고 1986년 온양시의 동(洞)이 되었다.

신정호 인근에는 조선시대에 이미 희안제(希安堤)라는 저수지가 있었다. 희안제는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온양군읍지」의 ‘제언’조에 연방제(蓮坊堤)[둘레 1,920장, 수심 6척], 종야제(宗也堤)[둘레 1,800장, 수심 3척]와 함께 기록되어 있는 저수지이다. 조선시대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저수지를 주로 제(堤) 또는 제언(堤堰)이라 하였고, 저수지(貯水池)는 일본인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 추정된다.

희안제의 규모는 ‘둘레 8백여 장, 수심 5척’이었다. 『여지도서』에 기록된 척(尺)이 주척(周尺)[1척은 약 21㎝]인지 영조척(營造尺)[1척은 약 31㎝]인지 알 수 없다. 10단위 이하 숫자가 불명확하고 사용된 척에 따라 둘레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를 파악할 수 없다. 1장(丈)이 10척이니 막연하게나마 둘레는 대략 1.7~2.7㎞로 작지 않은 편이고, 수심은 대략 1~1.5m로 깊지 않았다고 추정해볼 수밖에 없다. 희안제가 있던 곳은 희안마을 북쪽, 지금의 신정호 관광지 주차장 일대이다.

희안제는 지금의 신정호처럼 오목천을 직접 막아 만든 저수지가 아니다. 당시의 노동력과 경제력, 제방 축조에 필요한 토목기술에 일정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주요 하천을 막아 홍수에도 견딜 수 있는 저수지를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는 배방읍 공수리 1486, 1487번지 일대에 있었던 연방제[통칭 연방죽]나 동신사거리 남쪽[풍기동 206번지 일대 추정]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종야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신정호 축조]

신정호의 축조는 1926년 1월 26일에 온양수리조합 설립을 총독부로부터 인가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일제는 산업화의 결과로 식량이 부족해지자 우리나라에서 쌀을 수탈하여 이를 보충하고자 1920년부터 이른바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대대적인 수리시설 확충에 나서면서 아산 지역에도 도고저수지[1929], 죽산저수지[1942] 등 여러 저수지가 축조되었다. 그중 가장 먼저 축조된 것이 바로 마산저수지, 곧 신정호였다. 한편 1923년 가뭄과 수해, 1924년의 큰 가뭄으로 인한 아산 지역의 흉작은 수리시설 축조의 명분과 실리를 더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온양수리조합 설립 당시의 아산군수는 홍우숭(洪祐崇)이었다. 1923년 4월에 아산군수로 임명되어 1927년 3월까지 4년 동안 재직하였다. 홍우숭은 수리시설의 필요성을 느끼고 1925년경부터 온양수리조합 창립을 주도하였다. 홍우숭은 조선총독부 내무부 사회과에 근무했던 점을 이용하여 충청남도를 거치지 않고 총독부와 직접 교섭해서 조합 인가와 저수지 축조를 단시일에 추진하였다. 1927년 10월 1일 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전조선 수리조합 실황 답사기」 중 「충청남도 온양수리조합」 기사는 현재까지 확인되는 가장 상세하고 중요한 자료이다.

저수지 준공 직전인 1927년 3월 14일 자로 홍우숭은 홍성군수로 전임하게 되었고, 새로 아산군수로 온 조한욱(趙漢勖)이 마무리하였다고 하니 3월 말경에 준공된 것으로 보인다. 홍우숭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서 저수지 이름을 ‘홍공제(洪公堤)’라 하였고, 제방 동쪽 끝 둔덕 위에 지금도 남아 있는 준공비에도 ‘홍공제’로 기록되어 있다. 마산리에 제방이 축조되어 붙여진 ‘마산저수지’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에는 보이지 않아서 광복 이후 새로 붙여진 공식 명칭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주요 구조물로는 제당[제방], 제방의 동쪽 끝 근처에 설치한 급수탑[높이 31척 8촌, 직경 18척]과 통관[지하 배수관], 여수토[무넘기]와 방수로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준공 시기 만수 면적은 83.5정보[1정보는 약 1㏊], 2018년 기준 신정호 면적은 92㏊이다.

신정호곡교천에 개축한 실옥보(實玉洑)를 보완하는 시설인 동시에 서로 연계된 시설이다. 즉 신정호실옥보의 몽리구역(蒙利區域)[어떠한 이익이나 혜택을 입는 구역이란 뜻으로, 물이 들어와 관개의 혜택을 입는 곳 따위를 말함]에 포함되지 않는 방축동, 득산동, 배미동, 실옥동 일대의 농경지를 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불어 곡교천 방향[북쪽]으로 설치된 저수지 수로의 끝이 실옥보 수로에 연결되도록 설계함으로써 저수지의 물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홍공제[신정호]의 관개 능력은 590정보, 실옥보의 관개 면적은 660정보로 기록되어 있다. 기타 20정보를 합쳐도 기념비의 기록[1,280정보]과 10정보의 차이가 있다.

서로 연계되기 때문에 수로의 길이는 신정호 수로와 실옥보 수로가 합쳐져 기록되어 있다. 홍공제 준공비의 내용을 기준으로 하면 ‘간선(幹線) 1만 3000칸[間], 지선(支線) 7천 500칸[間]’이다. 1칸[間]을 1.82m로 계산하면 대략 간선 23.66㎞, 지선 13.65㎞이니 합하면 37.31㎞에 달한다. 이러한 수로를 통해 신정호의 물이 실옥보의 물과 합쳐지면서 신창면의 서북쪽 끝에 있는 신곡리 지역의 들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신정호의 유원지화]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1동에 있는 지금의 온양관광호텔 자리는 원래 조선시대 온양행궁이 있던 곳이다. 1904년에 일본 자본가 등이 온양행궁을 강탈하여 온양관이라는 일본식 여관 겸 대중탕으로 영업을 시작하였고, 1922년에 충남선[현재 장항선] 철도를 신설한 경남철도주식회사가 1926년 인수한 뒤 서양식 건물로 신축하여 신정관이라 하였다. 경남철도주식회사는 영업 전략으로 새로운 관광요소를 추가하기 위하여 홍공제의 수상권을 확보하고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워 추진하였다.

"온천수리조합저수지[수면 약 100정보]의 중앙에 수중 누각[건평 60평(건물면적 198m²)]을 건축하고 지중(池中)에 뽀트, 조선(釣船)[낚싯배] 등을 설비하야 내유객(來遊客)에 공개함. / 온천에서 저수지에 지(至)하는 도로[서남방 약 1리]를 수축하야 자동차를 운행케 하고 도로 양측에 관상수를 식재함." 이것이 바로 새로운 관광 요소를 추가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 결과 홍공제를 유원지로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무넘기 남남동쪽 130여 m 지점에 뭍에서 약 20m의 교량으로 연결된 수상 누각도 세웠는데 이를 ‘환벽루’라 하였다. 이 누각은 이후 ‘수상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현재도 기초 시설은 남아 있다. 일본인들이 집필하고 1929년 11월에 아산군에서 일본어로 간행한 『아산군지』[1929]에는 사진과 함께 ‘변천지(辨天池)’의 관련 기록이 보인다. 신정관 측이 임의로 저수지 이름을 ‘변천지’라 하여 어느 정도 알려지기는 했으나 주민들은 그다지 널리 쓰지 않았다. ‘신정호’라는 통칭은 신정관이 저수지를 유원지로 운영하면서부터 별명처럼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편의상 부른 이름일 수도 있고 저수지를 찾는 사람들이 부르기 쉽게 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퍼졌을 가능성도 있다.

온양온천에 목욕을 위해 왔던 사람들은 신정호에 들러 쉬거나 놀다 가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당시에 온양온천이 ‘조선의 자랑거리’라고 했을 만큼 단연 우리나라 최고의 휴양 및 관광지로 유명해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신정관의 부속 유원지인 신정호에도 역시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이미 초기부터 술과 음식을 팔던 수상각 외에도 유선[’야가다’라고 부르는 유람선. 약간 큰 놀잇배], 보트[두 명 정도 타고 노를 젓는 작은 놀잇배], 모터보트, 수중 자전차[요즘의 오리배 비슷한 것] 등도 갖추고 있었으니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유원지였다. 낚시는 물론이고 가을 단풍도 구경거리였으며 겨울에 스케이트도 탈 수 있었으니 사계절 유원지가 된 셈이다.

다양한 위락시설과 함께 인근에는 음식점들도 생기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연춘’이라는 음식점[장어구이집]도 1936년부터 한식집으로 문을 열었다. 온양 시내에서 신정호로 가는 도로도 정비되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그 중간쯤 되는 지금의 방축동 현대아파트 앞 삼거리 근처에 주막이 자리 잡고 ‘주막거리’라는 이름이 뒤늦게 생기기도 하였다.

[신정호의 변화와 현재]

신정호의 광복 이후 구체적인 변천 과정은 확인되지 않는다. 수상각 등 위락시설도 한때나마 적산으로 분류되었다가 1949년 12월의 「귀속재산처리법」 제정·공포 이후 민간에 불하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 이전의 미군정기에 편법적으로 처리되었을 수도 있으나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관광유원지로서의 신정호는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명성을 유지하였다. 저수지 자체는 온양수리조합에서 계속 관리하였지만 많은 업소들은 민간에서 운영하였다. 6·25전쟁 시기에는 크게 위축되었지만 1950년대 중반 이후 찾는 이들이 다시 많아졌다.

식당도 새로 늘어나고 여인숙 등도 생겼다. 여인숙은 숙박 기능보다는 놀이나 휴식 공간 제공이라는 기능이 더 컸다. 무넘기의 동남쪽, 수상각 주변의 흔히 ‘유원지’라고 일컫던 곳 일대만으로는 공간이 부족해졌다. 저수지 건너편, 제방 남서쪽의 천마산 옥련암 아래에도 저수지 가에 음식점들이 생겨 길게 이어졌다. 수상각 비슷하게 물 위에 띄워 만든 수정궁도 새로 들어섰다.

우리나라에 대도시 지역의 극히 일부 시설을 제외하면 변변한 놀이시설이나 놀이공간이 없던 시기였으니, 신정호 유원지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1960년대 말에 성역화 사업을 마친 현충사와도 연계되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70년대까지는 인근 지역의 마을이나 각종 모임을 갖는 사람들이 단체로 와서 놀다 가는 것이 연례행사였다. 아녀자들은 모처럼의 나들이를 위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술과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와서 북과 장구를 치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놀기도 하고 전축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중에는 속칭 악사 또는 밴드를 불러 노는 것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뱃놀이를 즐기기도 하고 사행성이 있는 소소한 오락시설들도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 어느 정도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신정호 유원지는 소득 증가와 놀이 행태의 변화로 급속히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다른 지역에 새로운 관광지와 다양한 놀이 및 레저 시설이 많이 생기고 버스를 대절한 관광이 유행하면서 찾는 발길이 줄어들었다. 더구나 해외여행도 가능해지면서 1990년 들어 상당히 쇠퇴하여 유원지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신정호 일대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84년에 신정호를 국민관광지로 지정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조금씩 주변을 정비해 오다가 1993년 이후 대대적인 정비와 공원 조성사업이 진행되었다. 남산 줄기의 서쪽에서 신정호에 걸쳐 27만 2000㎡의 넓은 공원을 조성하였다. 생태공원, 잔디광장, 조각공원, 청소년 수련시설[야영장] 등과 주차장,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잔디광장 남쪽에는 음향과 조명시설을 갖춘 야외 상설무대를 만들어서 여러 행사에 활용하도록 하였다.

2000년대 초부터 신정호 주변에 대한 새로운 정비가 추진되었다. 그동안 축산폐수와 생활하수의 유입, 무료 낚시터 개방 등 여러 이유로 악취가 심해질 만큼 물이 오염되고 썩었다. 기형 물고기도 나타나고 사람들의 발길이 멀어지게 되자 수질 개선을 위해 2003년 말부터 3년간 사업비 4억여 원을 들여 기존 수로 보완 및 연장 공사를 진행하여 송악저수지의 물을 신정호에 유입시키기 시작하였다. 물론 오폐수 유입 차단과 낚시 금지[2007], 수생식물 식재도 병행되었다.

2006년 2월부터 ‘신정호 생활체육공원 조성 사업’을 시작으로 5년간 총 350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신정호 종합개발계획’을 본격 추진하였다. 기반 시설로 산책로를 이용한 자전거 도로와 주차장 등이 조성되고 야외 수영장, 농구장, 족구장, 배드민턴장 등 각종 운동 시설도 조성되었다. 저수지 둘레에는 5㎞에 달하는 수변 순환 산책로와 각종 부대시설, 연꽃단지, 꼬리명주나비 생태학습장과 연계한 수생식물 전시장 등이 마련되었다. 산책로 주변에 LED 경관 조명 등 조명 시설, 음향 시설, 친환경 화장실 등 이른바 명품 공원을 위한 다양한 여러 가지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2010년 5월부터는 자전거를 시민들에게 무료 대여해 주고 있다.

2011년 초에는 순환 산책로 연결의 마지막 과제였던 교량 가설공사가 마무리되어 순환로가 완성되었다. 교량은 총연장 85m, 폭 4.25m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철재를 기본으로 하는 아산시 최초의 비대칭 사장교이다. 시민들에게 이름을 공모한 결과 ‘[애틋한] 사랑’의 옛말인 ‘다솜’을 쓴 ‘다솜다리’로 이름을 붙였다. 지금도 주변 정비와 시민 편의시설 등이 계속 조성되고 있다. 한편 2009년부터는 ‘신정호 자연생태공원 조성 사업’을 4년 계획으로 추진해 왔다. 생태 관련 놀이시설, 수생식물 체험장, 초화원, 민물고기 연못 등을 조성하여 2012년 말 마무리하였다.

2018년 기준 신정호 일대는 크게 보아 동쪽에 있는 도로[신정로] 지역의 신정호관광지, 도로 서쪽과 저수지 둘레의 신정호수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산시에서는 신정호수공원사업소를 설치하여 신정호관광지 주차장 입구에 사무실을 두고 관리하고 있다. 저수지 자체는 한국농어촌공사 아산지사가 관리한다.

2018년 기준 신정호 호수공원에는 하루 평균 2,000명이 찾아오고 있으며 중국인 관광객 등 외국인들의 방문도 늘어나고 있다. 밤에도 산책과 걷기 운동 코스로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주변에는 여러 해 전부터 카페와 전원주택들이 들어서고 있으며, 옛 유원지 자리는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아산의 신정호수공원은 우리나라 최고의 호수공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시민들에게 행복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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