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674
한자 孟思誠
영어공식명칭 Maeng Saseong
이칭/별칭 자명(自明),고불(古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강경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60년 7월 17일연표보기 - 맹사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86년 - 맹사성 문과 전시에 장원급제
활동 시기/일시 1399년 - 맹사성 우간의대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06년 - 맹사성 이조참의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08년 - 맹사성 사헌부대사헌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11년 - 맹사성 판충주목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16년 - 맹사성 예조판서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25년 - 맹사성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31년 - 맹사성 의정부 좌의정에 제수
몰년 시기/일시 1438년연표보기 - 맹사성 사망
추모 시기/일시 조선 초 - 맹사성 효행으로 정려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7년 6월 1일 - 고불맹사성기념관 개관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시
묘소|단소 맹사성선생 묘 -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27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신창
대표 관직 우의정|좌의정

[정의]

충청남도 아산 출신이자 청백리의 상징인 조선 전기 때 문신.

[개설]

맹사성(孟思誠)[1360~1438]은 권근(權近)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 1386년(우왕 12) 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을 거쳐 내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된 이래 정종, 태종, 세종 대까지 4대 왕을 모셨다. 맹사성은 청백리의 상징이자 명재상으로 명성을 떨쳤다.

[가계]

맹사성의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이다. 신창맹씨(新昌孟氏)는 중국 맹자(孟子)의 40세손인 맹승훈(孟承訓)이 당나라 말기에 신라로 넘어와 충청남도 아산 지역 신창에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후손인 맹의(孟義)는 신창맹씨 1세조로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예부시랑(禮部侍郞)을 거쳐 예부전서(禮部典書)에 오른 인물이다. 당대 학자로도 유명했던 맹의는 조적(曹頔)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고, 충선왕 때 신창백(新昌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신창을 본관으로 하였다. 명문세도(名門勢道)의 가문으로, 맹사성의 할아버지는 맹유(孟裕)로 이부상서(吏部尙書)였다. 아버지는 고려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맹희도(孟希道)이며, 최영(崔瑩)의 손녀사위이다.

[활동 사항]

맹사성은 조선 태조 때 예조의랑이 된 이래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1408년(태종 8)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을 때, 지평(持平) 박안신(朴安信)과 함께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이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을 듣고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고문하여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 처형될 뻔하지만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1411년(태종 11)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判忠州牧事)에 임명되자, 예조(禮曹)에서는 맹사성이 특히 피리 불기에 능해 음율(音律)에 정통하므로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여 바른 음악을 가르치도록 건의한 바 있다. 그 이듬해 영의정 하륜(河崙)이 음악에 밝은 맹사성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간청하였다.

1427년(세종 9) 우의정 재임 시에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 감관사(監館事)로서 감수하였다. 『태종실록』이 완성되어 세종이 부왕인 태종의 기록이 궁금하여 살펴보고자 하였으나, 맹사성이 단호히 거절하여 실록을 확인하지 않았다. 1429년(세종 11) 나이가 지긋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려는 맹사성에게 세종은 궤장(几杖)[임금이 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늙은 대신에게 하사하던 궤(几)와 지팡이]을 하사하여 끝까지 맹사성과 함께 있도록 하였다. 그 후 1431년(세종 13) 좌의정에 오르고 6년간 세종을 더 모시다 1435년(세종 17)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온양으로 내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맹사성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맹사성은 고향에서 한가롭게 생을 보내며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라는 시를 지었다. 맹사성은 벼슬에 있을 때나 물러났을 때나 항상 청백하여 식량은 늘 녹미(祿米)[녹봉으로 주던 쌀]로 하였고, 출입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태우는 가마도 사용하지 않고 소 타기를 좋아하였다. 79세에 사망하였을 때 세종은 친히 조상(弔喪)하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학문과 저술]

맹사성의 저서는 주로 관찬(官撰) 사료로 법률 혹은 종실의 『보첩(譜牒)』, 『태종실록』, 『팔도지리지』, 『고려사』 등이 있다. 또한 맹사성이 76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온양으로 낙향하여 지은 「강호사시가」와 한시 「연자루(燕子樓)」가 있다.

[묘소]

맹사성선생묘(孟思誠先生墓)는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27번지의 곧은골 또는 직동(直洞)이라고 부르는 곳에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맹사성의 시호는 문정이며,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마을 입구에는 신창맹씨 문중 효자 4명의 효행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旌閭)가 있는데, 정려 4기 중 하나가 맹사성의 정려이다. 2017년 6월 1일에는 고불맹사성기념관을 배방읍 행단길 22[중리 275]에 개관하여 맹사성의 청백리 정신을 이어받아 공무원은 물론 학생들의 교육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