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555
한자 牙山孟氏杏壇
영어공식명칭 House of the Maeng Clan, Asan
이칭/별칭 맹사성 고택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행단길 25[중리 300]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호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330년 2월 17일연표보기 - 아산 맹씨행단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482년 10월 6일 - 아산 맹씨행단 고택 중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642년 8월 28일 - 아산 맹씨행단 고택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754년 - 아산 맹씨행단 고택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764년 - 아산 맹씨행단 고택 개와
개축|증축 시기/일시 1929년 9월 9일 - 아산 맹씨행단 고택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1963년 1월 21일연표보기 - 아산 맹씨행단 사적 제109호 지정
개축|증축 시기/일시 1964년 11월 10일 - 아산 맹씨행단 고택 부엌 철거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9년 11월 - 아산 맹씨행단 고택 지붕 보수, 대문채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8년 8월 - 아산 맹씨행단 고택 지붕 보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8년 11월 - 아산 맹씨행단 고택 벽체 보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5년 9월 - 아산 맹씨행단 고택 문간채 보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7년 - 아산 맹씨행단 고택 지붕 보수
현 소재지 아산 맹씨행단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행단길 25[중리 300번지]지도보기
성격 사적
양식 맞배지붕[고택]|팔작지붕[세덕사]|팔작지붕[구괴정]
정면 칸수 4칸[고택]|3칸[세덕사]|3칸[구괴정]
측면 칸수 3칸[고택]|2칸[세덕사]|3칸[구괴정]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제109호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에 있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맹사성이 기거하였던 건물.

[개설]

아산 맹씨행단은 조선 초의 명재상인 맹사성(孟思誠)[1360~1438]이 기거하고 후학을 길러낸 곳이다. 맹사성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7일간 단식하고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판서와 좌의정 등의 높은 벼슬을 하고 있으면서도 검은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다닌 우리나라 대표적 청백리이자 명재상으로 그 이름이 높다.

아산 맹씨행단에는 고택, 세덕사(世德祠), 쌍행수(雙杏樹), 구괴정(九槐亭)이 있다. ‘행단’이란 이름은 고택의 뜰 안에 맹사성이 심었다는 600년이 넘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쌍행수]에서 유래한 것이다. 본래 ‘행단(杏壇)’은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는 데서 비롯된 말로 일반적으로 학문을 갈고 닦는 곳을 말한다.

[위치]

아산 맹씨행단은 아산시 배방읍 행단길 25[중리 300번지]에 있으며 온양온천역에서 동남쪽으로 약 6㎞ 지점이다. 국도 21호선 좌부교차로에서 남쪽으로 고불로를 따라 1㎞ 정도 간 뒤 금곡보건진료소 맞은편 골목길로 200여 m 올라가면 아산 맹씨행단이 있다.

[변천]

아산 맹씨행단의 고택의 건립 시기는 고려 말로 추정하고 있다. 고택의 중수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맹씨세적(孟氏世蹟)』「행단고택중수유래현판게시문(杏壇古宅重修由來懸板揭示文)」에 따르면, 고택을 지은 시기가 1330년(충숙왕 17) 2월 17일, 고려 말 무민공 최영(崔瑩)[1316~1388] 장군이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1330년은 최영 장군의 나이가 겨우 15세이기에 최영의 부친인 최원직이 이곳에 들어와 집을 지었다고 본다. 최영 당시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맹사성의 부친인 맹희도(孟希道)가 조선왕조 개창에 반대하며 낙향하여 기거한 이래 맹사성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최영의 소유에서 맹씨 가문으로 넘어간 배경에 대해서는 최영의 손녀와 맹사성의 혼인으로 맹희도의 낙향 이전에 이미 가옥 등이 손녀에게 상속된 것으로 보고 있다.

「행단고택중수유래현판게시문」에 의하면 맹사성의 손자 세마공이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당하여 전라도 순천으로 피란하고 막내아들 호군공으로 하여금 집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이때 기와가 무너지는 변괴가 발생해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과 함께 묵서명의 내용을 근거로 할 때 1482년에 호군공이 중수를 하였고, 이때 손좌건향(巽坐乾向)이었던 고택 방향이 계향(癸向)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대청 중도리 받침장혀 묵서명에 "이전의 좌향은 손좌건향이었다. 향을 바꾸어 입주상량하였다. 이후 계향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음]. 대청 후측 장도리 묵서에는 정확한 중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1642년 8월 28일과 1754년에도 고택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또, 담장에 사용된 기와 중 제작 시기가 새겨져 있는 명문기와가 발견됐는데, 이 망새기와에 ‘건륭 29년(乾隆二十九年)[1764년]’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 시기에 개와를 포함한 공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1900년대 이후 중수 기록은 「행단고택중수유래현판게시문」에 다시 나타난다. 호군공의 13세 지손인 면장 맹용순이 "단기 4262년[1929년] 기사(己巳) 9월 9일에 중수하였다."는 내용과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1964년 중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9호로 지정된 이후 실시한 1964년의 보수공사는 건물 전면으로 돌출되어 있던 부엌 칸을 철거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 공사였으며, 이때부터 아래쪽에 관리동[별채]을 짓고 후손들이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고택에서는 사람이 기거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로는 1979년 11월 지붕 보수 및 대문채 중수, 1988년 8월 지붕 보수 공사, 같은 해 11월에는 벽체 보수 공사, 1995년 대문채 보수 공사, 1997년 지붕 보수 공사가 이어졌다.

[형태]

아산 맹씨행단에 있는 고택은 정면 4칸, 측면 3칸이나 정면 가운대 2칸이 반 칸씩 안으로 들어간 ‘工’ 자형 평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맞배지붕 구조이다. 고택의 가구 구조에서 고려 말 조선 초기 양식의 솟을합장과 대공을 볼 수 있다. 고택의 솟을합장은 아주 약하게 안으로 굽어진 형태로, 상단은 종도리 좌우에 대서 종도리의 수평 이동을 방지하고 하단은 종보에 지지하고 있다. 솟을합장은 봉정사 극락전에서부터 17세기까지 사용되며, 주로 주심포계 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또, 대공은 동자기둥처럼 가늘고 긴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으며, 그 위에 소로를 얹고 종도리 받침장혀를 받치고 있다. 이러한 사다리골 형태의 대공은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며,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1375년], 부석사 조사당[1377년], 해인사 동서 사간고[1488년] 등과 유사하다. 이와 함께 첨차에 나타나는 쌍 ‘S’ 자 무늬는 무위사 극락전[1476년 이후 건립]이나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의 쇠서와 유사하다.

세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전면 반 칸 열에 툇기둥을 세워 벽체와 창호를 설치하여 툇마루 공간을 두고 있다. 지붕부는 팔작지붕의 구조이다. 구괴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 규모의 정자이다. 바닥은 모두 마루를 깔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창호나 벽체가 없이 모두 개방되어 있다. 세덕사와 마찬가지로 지붕부는 팔작지붕 구조이다.

[현황]

아산 맹씨행단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9로 지정되었다. 고택의 최초 건립 이후 여러 차례 중수, 보수를 거치며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고택의 북동쪽에 있는 세덕사는 맹사성과 그의 조부인 맹유(孟裕), 부친인 맹희도 세 사람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사당은 후대에 지어진 것이나 최초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다. 이곳에서 매년 10월 10일 숭모제가 열리고 있다. 구괴정은 고택 외곽의 담장 밖에 자리하고 있다.

고택에서 서쪽으로 난 협문을 통해 나가면 낮은 언덕이 보이는데, 그 위로 구괴정이 자리하고 있다. 1994년 발간된 『맹씨행단 성역화사업 종합정비 기본계획』에는 "지금은 터만 남고 정자는 훼손된 지 오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당시 정자 터의 모습만이 사진으로 남아 있어 최근에 복원된 정자임을 알 수 있다. 최초의 구괴정의 모습과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다. ‘구괴정’이란 이름은 맹사성, 황희(黃喜)[1363~1452], 권진(權軫)[1357~1435][맹사성, 황희, 허조(許稠)라고도 전해짐]이 함께 이곳에 각각 세 그루씩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세 정승이 이곳에서 시문을 짓고 국정을 논하였다고 하여 ‘삼상당(三相堂)’이라고도 하였다. 현재 정자 정면으로 ‘삼상당’, 내부 전면에는 ‘구괴정’ 현판이 걸려 있다.

아산 맹씨행단 바깥 마당 맞은편에는 2017년 6월 1일 개관한 고불맹사성기념관이 있고 북쪽 약 300m 지점 도로변에는 맹사성 등의 효자정려와 후손들 관련 비석 등이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아산 맹씨행단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청백리이자 명재상으로 널리 알려진 맹사성이 살았던 곳으로 후손에게 이어지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공직자의 표상이자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긴 맹사성을 기리며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문화유적이다. 또한 고려 말에 지어진 유일한 민가 건물로 고택이 남아 있는데, 현존하는 살림집으로는 건물의 연혁이나 구조적인 기법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어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