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희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671
한자 孟希道
영어공식명칭 Maeng Huido
이칭/별칭 동포(東浦)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강경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37년연표보기 - 맹희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65년 - 맹희도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88년 - 맹희도 온양 금곡촌으로 낙향
추모 시기/일시 1634년 - 맹희도 정퇴서원에 제향
거주|이주지 낙향지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맹희도 묘 - 충청남도 아산시 법곡동 산6-1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세덕사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정퇴서원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금곡서원지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서원골 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신창
대표 관직 한성좌윤|우의정

[정의]

고려 말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효자이자 문신.

[개설]

맹희도(孟希道)[1337~?]는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좌윤(漢城左尹), 전교부령(典校副令), 전교령(典校令),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등을 지냈고, 우의정에 증직(贈職)되었다. 고려 말의 두문동(杜門洞) 72인 중의 한 명으로서 1388년(우왕 14)에 관직을 버리고 온양의 금곡촌(金谷村)[현재 배방읍 중리] 오봉(五峰)[설화산(雪華山)] 아래에 있는 작은 계곡 옆에 일실(一室)을 걸고 은둔하였다. 그런데 오봉의 동쪽 한 모퉁이에는 작은 폭포가 있고, 이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 작은 못이 있었다. 당시 맹희도는 바로 이 연못에 홍교(虹橋)를 만들어 놓고 개경의 송악산(松嶽山) 아래에 있는 자하동(紫霞洞)의 선인교(仙人橋)를 칭탁하여 ‘자하동 선인교’라고 명명하면서 고려에 대한 절의를 잊지 않았다.

[가계]

맹희도의 본관은 신창(新昌), 호는 동포(東浦)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충렬왕 때 예부전서(禮部典書)를 지낸 맹의(孟儀)고, 아버지는 이부상서(吏部尙書)와 순창군수를 역임한 맹유(孟裕)이며, 부인은 홍양조씨(洪陽趙氏)이다. 맹희도는 아들을 두 명 두었는데 장남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재상을 지낸 맹사성(孟思誠)이고, 차남은 맹사겸(孟思謙)이다.

[활동 사항]

맹희도는 아버지 맹유가 절개를 지키며 두문동으로 들어가자 서천 한산[현재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으로 피했다가 벼슬을 버리고 온양의 금곡촌에 은거하며 후배들을 양성하였다. 맹희도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묘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 일로 맹희도는 정려(旌閭)를 받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온양군」에 정려를 받았다는 기록이 보이고, 『동국삼강행실도』에는 태조 때에 정문(旌門)을 받았다고 쓰여 있다. 신창맹씨(新昌孟氏) 족보에는 고려 공양왕 때에 생정(生旌)을 받았고, 조선 태조 때에 복정(復旌)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맹희도가 살아 있을 때 정려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정종 때 사우(祠宇)를 세워 배향하였다. 영조 때에 영조가 온양에 행행(行幸)하던 중 서원에 치제(致祭)하도록 하였고, 어제(御製) 사액(賜額)을 내렸으니 ‘충효세업청백가성(忠孝世業淸白家聲)’이라 하였다.

[묘소]

맹희도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법곡동 산6-1에 있다. 설화산을 조산(朝山)으로 바라보면서 자리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배방면 중리 원중리마을에는 효자 맹희도 정려아산 맹씨행단(牙山孟氏杏壇) 뒤편의 세덕사(世德祠)에 아버지 맹유, 아들 맹사성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어 있다. 또한 1634년(인조 12)에 건립된 정퇴서원(靜退書院)에 제향되었다. 정퇴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 배방읍 중리 서원골에는 맹희도를 제향하였던 사우인 금곡서원지(金谷書院址)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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