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981
한자 孝子孟希道旌閭
영어공식명칭 Monument for Filial Son Maeng Hui-do[Hyoja Maeng Hui-do Jeongnyeo]
이칭/별칭 신창맹씨 정려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고불로 563-9[중리 336-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여송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효자 맹희도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고불로 563-9[중리 336-1]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도리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4칸
측면 칸수 1칸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에 있는 효자 맹희도의 조선 초기 정려.

[개설]

맹희도(孟希道)[1337~?]는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호는 동포(東浦)이며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으로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키며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순절한 이부상서(吏部尙書) 맹유(孟裕)의 아들이며, 고불 맹사성(孟思誠)의 아버지이다.

1365년(공민왕 14)에 문과에 급제하고 전교부령(典校副令), 한성부윤(漢城府尹), 한림어사(翰林御使)를 거쳐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맹유가 절개를 지키며 두문동에 들어가자 따라서 벼슬을 그만두었고, 두문동 사건 이후 충청남도 서천 한산으로 내려가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약 3년간 머물렀다. 1392년경에 온양 금곡동, 곧 현재의 배방읍 중리로 와서 은거하면서 강학과 후배양성에 힘써서 온양에 성리학을 처음 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맹희도는 어진 선비로서의 생활뿐만 아니라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직접 흙을 져다 봉분을 만들었고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상의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그때 흰 새가 날아와 머물렀다고 한다. 이러한 효행은 마을 사람들과 문중의 귀감이 되었고, 정문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정려를 받았다는 기록이 보이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태조 때에 정문을 받았다고 쓰여 있다. 신창맹씨 족보에 고려 공양왕 때 생정(生旌)을 받았고, 조선 태조 때 복정(復旌)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맹희도가 살아 있을 때 정려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맹희도의 사망 연도는 확인되지 않지만 맹사성의 행적을 근거로 보면 1423년(세종 5)으로 추정된다. 맹희도는 1634년 인근에 건립된 정퇴서원에 배향되었다. 영조 때에는 영조가 온양온천에 행차하던 중 법곡동에 있는 맹희도의 묘에 치제토록 하였고, 어제사액을 내렸으니 ‘충효세업청백가성(忠孝世業淸百家聲)’이라 하였다.

[위치]

효자 맹희도 정려아산시 배방읍 중리에 있다. 금곡초등학교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지점, 큰길인 지방도 623호선[고불로]에서 서쪽으로 40여m 지점의 둔덕 위에 세워져 있다.

[변천]

효자 맹희도의 효자리(孝子里) 비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축동리에 1기가 있고 아산시 배방읍 중리에도 1기가 있다. 모두 왕조 교체가 이루어진 1392년에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한산면 축동리의 효자리 비는 공양왕 재위 마지막 시기에, 배방읍 중리의 것은 조선 태조가 즉위 직후 다시 내려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위치에 정려각이 세워지고 명정 현판이 걸린 것이 어느 시기인가는 명확하지 않고 이후의 구체적인 변천 과정도 확인되지 않는다.

[형태]

효자 맹희도 정려가 있는 정려각은 흔히 ‘신창맹씨 정려’라 부르며 정면 4칸, 측면 1칸의 도리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매우 긴 장주 초석 위에 기둥을 올렸고 벽은 사면 모두 홍살을 설치하였다. 화려한 단청이 이루어졌고 양 옆에는 풍판을 달았다. 정려의 왼쪽부터 효자 맹희도, 효자 맹사성, 효부 양주조씨(揚州趙氏), 효자 맹흠규(孟欽圭) 순으로 신창맹씨 집안의 효자·효부 네 명의 명정 현판 및 비가 있다.

효자 맹희도 정려는 맨 왼쪽 칸에 있는데, 바닥 중앙에는 효자리 비가 세워져 있고 위에는 명정 현판이 걸려 있다. 명정 현판에는 ‘효자 검교한성부윤 겸수문전제학 증의정부좌의정 맹희도지려(孝子檢校漢城府尹兼修文殿提學贈議政府左議政孟希道之閭)’라고 쓰여 있다. 비석에는 전면 중앙 상단에 큰 글씨로 "효자리(孝子里)"라 각서되어 있고, 아랫부분에는 작은 글씨로 ‘전전교훈령 맹희도 홍무임○십이월 일 입(前典校訓令孟希道洪武壬○十二月 日)’이라 각서되어 있다.

홍무 연간에 ‘임(壬)’ 자가 들어간 해 중 공양왕이 물러나고 이성계가 왕이 된 것이 1392년 7월이고 그 해가 임신년(壬申年)이다. 서천 한산 축동의 효자리 비와 신창맹씨 족보의 기록 등을 고려할 때 이 효자리 비는 1392년 하반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려의 구조 양식은 우리나라의 정려 구조와 중국의 것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과도기의 양식으로, 아마도 먼저 비석을 세우고[또는 비석과 허문 형태의 정문을 같이 세우고] 후대에 이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구조는 먼저 명정 현판의 윗부분에 있는 홍살이 없어지면서 더불어 비석도 없어지는 양식으로 이행하게 되며 그 후 정려의 일반적인 구조 양식으로 나타나 현재에 이르게 된다.

[의의와 평가]

동포 맹희도는 아산 지방에 성리학을 처음 전파한 학자로서 정퇴서원에 배향되었던 인물이다. 동시에 지극한 효를 실천하여 생전에 이미 효자 정려가 내려졌으며, 그의 효행은 모범적 사례로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희도부상(希道負上)으로 실린 효자이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효자 맹희도 정려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려의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의미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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