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413
한자 顯忠祠重建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홍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 이종옥 동일은행에서 이충무공의 위토(位土)를 담보로 1,300원 대출
발단 시기/일시 1931년 5월 13일 - 동아일보에 이충무공 집안의 위토 관련 기사 게재
전개 시기/일시 1931년 5월 14일 - 동아일보에 이충무공 집안의 위토 관련 사설 게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1년 5월 23일 - 이충무공유적보존회 설립
전개 시기/일시 1931~1932년 - 이충무공 유적 보존을 위한 각계각지 성금 모금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1년 6월 26일 - 이광수 장편소설 「이순신」 『동아일보』에 연재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32년 6월 5일연표보기 - 현충사 낙성식 및 영정 봉안식 거행
발생|시작 장소 현충사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126[백암리 298-1]지도보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이충무공유적보존회|이종옥|송진우|정인보|이광수|윤치호

[정의]

1931년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와 위토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상황에서 전개된 거족적 모금운동.

[개설]

1931년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가 경매로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동아일보에서는 관련 기사를 작성하여 실었으며 송진우(宋鎭禹)·정인보(鄭寅普) 등은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여 동아일보사의 협력으로 성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후 전국적으로 자발적인 성금이 답지하여 이를 기반으로 현충사(顯忠祠) 사당을 다시 건립하는 사업이 진행되었고, 1932년 6월 5일 낙성식과 함께 영정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역사적 배경]

현충사는 1706년(숙종 32) 충청도 유생들이 숙종에게 상소하자 조정에서 이를 허락해 건립한 사당이다. 1707년(숙종 33) 숙종이 현충사에 사액(賜額)[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내린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으나, 1906년 을사늑약에 분노한 유림들이 현충사 자리에 현충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경과]

1919년 3·1운동 이후 충무공 이순신의 13대 종손 이종옥(李種玉)은 살림이 점점 어려워지자 이충무공의 위토(位土)를 담보로 동일은행(東一銀行)에서 1,300원을 대출받았다. 이 위토는 사당 유지비, 제향비 등의 사용을 위하여 필요한 토지였다. 이종옥은 일본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으며 1923년 12월 독립운동 시국 사건에 또 한번 휘말렸다. 아산 온천리경찰서 고등계에 체포된 이종옥은 경성으로 압송되어 고초를 당했다. 이후 아산으로 돌아온 이종옥은 1930년 자택에 덕의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에게 민족정기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 무렵 동일은행에 진 빚이 이자가 불어나면서 1931년 총 2,400원에 이르렀다. 1930년대 조선인 공장 노동자 월급[22원]의 100배가 넘는 금액이다. 그런데 이 대출금을 계속 갚지 못하자 동일은행에서 경매로 처분할 예정이라는 최후 통지를 하였다. 이 당시 이종옥은 위토 외에도 묘소가 있던 산판(山坂)에도 채무관계가 있는 상황이었다. 이충무공의 고택과 임야, 묘소까지도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동아일보』에 알려지게 되었다.

『동아일보』는 1931년 5월 13일과 14일 "임진란, 거북선과 함께 역사를 지은 민족적 은인 이충무공의 위토 60두락지기가 장차 경매에 넘어갈 운명에 있다."는 내용의 기사와 "이충무공의 묘소 위토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민족적 정열의 냉각과 민족적 자부심의 마비를 통탄"하는 사설을 실어 이충무공의 유적 보존을 전민족적으로 촉구하였다. 이 기사가 나가자 이충무공의 유허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각계각지에서 성금이 도착하는 등 추모열이 넘치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모인 성금은 다음 해인 1932년까지 2만여 명, 400여 개 단체, 총 1만 6021원 30전이었다. 직공부터 어린이까지 10전, 20전씩 정성을 모은 것이었다.

송진우, 정인보 등 각계 인사들은 이를 기반으로 하여 ‘이충무공 유적 보존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1931년 5월 23일 윤치호(尹致昊)를 회장으로 하는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설립하였다. 이충무공유적보존회는 김병로(金炳魯), 윤현태(尹顯泰)가 위토 채무보상에 관한 업무를 맡는 한편, 성금을 가지고 현충사를 중건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현충사 중건을 위해 유억겸(兪億兼), 정인보, 백관수(白寬洙)가 아산에 직접 내려가 실지 조사하고, 앞으로의 보존회 사무 일체 경비를 각자 부담하기로 결정하였다.

『동아일보』는 지속적으로 이충무공 관련 기사를 실었고, 편집국장이었던 이광수(李光洙)는 장편소설 「이순신」을 1931년 6월 26일부터 178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결과]

이충무공유적보존회 활동과 성금 모금 등 전민족적인 성원과 노력 끝에 1931년 7월 11일 현충사 중건이 착수되어 이듬해인 1932년 6월 5일 낙성식과 함께 이충무공 영정이 봉안되는 행사가 열렸다. 영정은 이상범(李象範)이 그렸다고 하며 새로 꾸민 사당에는 영정 외에도 이충무공의 검, 금대(金帶)[조선시대에 벼슬아치가 조복(朝服)에 띠던 띠], 일기, 칙지(勅旨)[임금이 내린 명령] 등 유물을 안치하였다. 봉안식 행사에는 현충사 주변에 3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하며, 심지어 천안~온양 간 임시 열차가 운행되었다고 한다. 위토 문제도 해결되었으며 기존의 땅 이외의 추가 위토를 구입하였다.

[의의와 평가]

현충사 중건 운동은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 1931년 만주사변 등으로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이 변화하는 시점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층은 보존을 위한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각지에서 성금이 모금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충무공에 대한 민족적 관심의 발로였으며, 민족문화 수호를 위하여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므로 민족운동의 일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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