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의병 활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410
한자 抗日義兵活動
영어공식명칭 The Anti-Japanese Movement of the Righteous Armies
이칭/별칭 항일 의병,항일 의병 운동,한일 의병 투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홍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894년 - 갑오변란, 청일전쟁 발발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5년 - 이세영 항일 의병 활동으로 홍주 의진 참여
전개 시기/일시 1906년 - 이세영, 곽한일, 성재한, 이용규 항일 의병 활동으로 홍주 의진 참여
전개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 의병 약 60명 항일 의병 활동으로 신창군 분파소 습격
종결 시기/일시 1907년 11월 - 이규남 항일 의병 활동으로 체포 및 처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 - 홍재선 항일 의병 활동으로 온양 등에서 활동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유인석|이세영|최익현|곽한일|성재한|이용규|이규남|홍재선|제천 의진|홍주 의진|호남 의병진

[정의]

한말 을미사변 이후 1909년까지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국권 회복을 위하여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개설]

한말 의병은 국가와 민족을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보전시키고자 자발적으로 무장 항쟁한 군사 집단이다. 주자학적 의리론과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중화를 받들고 이적을 물리침]을 기본으로 하는 국수보복론(國讐報復論)[국모의 원수를 갚아야 함]과 안민론(安民論) 등의 이념적 성격을 띠었다. 한말 의병은 봉기한 시기에 따라 전기 의병, 중기 의병, 후기 의병으로 나눌 수 있다.

[역사적 배경]

전기 의병[1894~1896]은 1894년(고종 31) 7월의 갑오변란과 청일전쟁의 발발, 개화파의 변복령과 단발령 등 일련의 친일적 개화 정책의 추진과 명성왕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등에 항거하여 유생 주도로 일어났다.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전시적 상황을 이유로 대한제국에 군사를 합법적으로 상시 주둔시킬 수 있도록 명문화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전기 의병 후 전국 각지로 흩어졌던 의병들이 다시 봉기하여 중기 의병이 시작되었다. 중기 의병은 1905년 을사조약의 늑결(勒結)[강제 체결]로 더욱 격앙되었다. 중기 의병은 주로 남한의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투쟁을 강화하였다. 중기 의병은 전기 의병에 비해 전투력이 다소 향상되었으나 의병장은 유생이나 전직 관료가 대부분이었고, 농민들이 전투력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참여 세력이 다양화되었고, 전기 의병에 비해 상소나 시위 형태의 활동을 지향하고 구국 의병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경과]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처음으로 의병 활동이 파악되는 것은 1896년(고종 33) 2월로 보인다. 1896년 2월 유인석(柳麟錫)이 이끈 제천 의진(堤川義陣)의 일파인 이범직(李範稷) 부대가 천안에서 활동하던 중 공주에서 출동한 진위대 관군의 추격에 온양-아산-예산 방면으로 후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전기~중기 의병 단계에서 아산 지역에서 활동했던 의병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전기 의병 중 1895년(고종 32) 말 홍주 의진(洪州義陣)에 아산 출신인 이세영(李世永)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홍양기사(洪陽紀事)』[홍주 의진 거사 계획에 참여하였던 임한주(林翰周)가 엮은 기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세영은 홍주 의진 거의(擧義) 당시 정산[현재 청양군 정산면]에 이주하여 살고 있었으며 안병찬(安炳瓚) 등의 거사 제의에 따라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아산 출신 의병 세력들은 1906년 다시 의병을 일으킨 홍주 의진에 참여하였다. 이세영과 곽한일(郭漢一), 성재한(成載翰), 이용규(李容珪) 등은 의병장, 중군장, 돌격장, 운량관(運糧官) 등 주요 직책을 맡아 의병 활동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진압에 나서게 되면서 성재한이 순국하고, 이세영 등은 유배를 당하였다. 이용규는 아산 봉곡사 주변에서 거의를 도모하려다 실행치 못하고, 예산 대술면 이남규(李南珪)의 집으로 가 다시 거의를 논의하였으나 계획이 누설되면서 실패하였다. 이후 이남규송악 평촌리 앞뜰에서 아들 등과 서울로 압송 도중 일제에 의해 피살당하였다. 한편, 곽한일은 최익현(崔益鉉)의 호남 의병진(湖南義兵陳)과 연을 맺기도 하였다. 최익현은 1862년(철종 13) 신창현감으로 약 1년간 재직했던 경험이 있으며 그 뒤로는 정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06년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거의하였을 때 최익현의 문인이었던 아산의 곽한일과 예산의 남규진(南奎振)이 호서 지역의 책임을 맡아 거의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호서 지역 의병 세력과 최익현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 지역 의병 세력 간의 통신책을 담당하였다.

후기 의병 시기에는 아산 지역에서 전투가 있었다. 1907년 신창 지역에는 신창 온양 부근을 습격하던 의병이 아산을 경유하여 천안 성환 간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의병 약 60명이 신창군 분파소(分派所)를 습격하였는데, 일본 보조원 1명이 머리 부위 3군데에 상처를 입었고 의병은 서방산곡(西方山谷)으로 퇴진하였다고 한다. 보조원 일행은 온천리로 몸을 피하였고, 일본군이 온양 방면으로 출발하자 의병 20~30명은 아산을 지나 천안 성환 간의 철로를 횡단하고 동남으로 향하였다.

일본 경찰의 충청남도 의병 상황에 대한 보고에 의하면, "해미 서산군 지방에 약 20명으로 일대를 조성한 의병이 출몰이 부절(不絕)하며 또 신창군에는 50~60명으로 일대를 조성한 의병이 출몰하고 기타 청양군 지방에도 불온한 태도가 유하고 태안군 안면도 및 그 부근에는 각 70~80명씩으로 일대를 조성한 의병이 출몰 부절”하였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더 적극적인 의병의 활동도 파악되는데 1907년 11월 26일, 11월 29일 『황성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 달 16일에 의도(義徒) 수십 명이 아산군에 총을 들고 뛰어들어 군수를 위협하면서 군물(軍物)을 토색(討索)하고 일대(一隊)는 분파소로 달려들어 벽과 창을 부술 때에 순검 이상구(李相龜) 씨는 총을 맞고 중상을 입고 순검 복장과 군도(軍刀)와 총 몇 정을 빼앗긴지라. 분파소 보조원과 우편소장은 다른 곳으로 도피하였다더라."[1907년 11월 26일자]

"이달 15일에 의도 수십 명이 아산군에 돌입하여 각 공해(公廨)[관가의 건물]를 파쇄하였다 함은 앞선 보도에 게재하였거니와 이후 일본 병사가 아산군에 도달하여 수서기(首書記)[책임서기] 이규남(李圭南) 형제를 포박하여 신창 연봉점(延逢店)에서 포살(砲殺)하였다더라."[1907년 11월 29일자]

『황성신문』 등의 자료에 의하면 1907년 11월 15일 또는 16일에 의병 수십 명이 무장을 하고 아산군에 들어와 관공서를 습격하고 군수를 위협, 총과 무기를 빼앗아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순검 1명이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이다.

[결과]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항일 의병 활동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후에 일본군이 사건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이규남이라는 군 서기를 지원자로 판단해 체포하여 처형했다는 점이다. "이규남은 1907년 11월 16일 충청남도 아산군의 서기로 재직 중 의병과 연계하여 길 안내를 하는 등 지원 활동을 하였으며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탈출을 기도하다가 피살,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909년 3월 일제가 조사한 홍주군[현재 홍성군] 및 인근 지역의 의병 활동 상황에도 홍재선(洪在善) 등이 의병을 일으켜 온양 등에서 활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자료로 확인되는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아산 지역 곳곳에서 항일 의병 활동이 다양하고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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