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423
한자 衡平社運動
영어공식명칭 Social Equality Movement
이칭/별칭 형평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형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3년연표보기 - 형평사 운동 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4월 - 형평사 아산분사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3년 4월 - 형평사 회원 이한용 피체
종결 시기/일시 1937년연표보기 - 형평사 운동 종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이한용|형평사|형평사 아산분사

[정의]

1920~1930년대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형평사 아산분사를 통해 벌인 신분차별 철폐운동 및 사회운동.

[개설]

형평사(衡平社) 운동은 일제강점기에 백정(白丁)들이 갑오개혁에 의해 법률상으로 천인(賤人) 신분에서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에서는 신분이 존속되어 차별받던 상황을 타개하고자 한 운동이다. 아산 지역에도 형평사 아산분사(牙山分社)가 설치되어 활동을 펼쳤다.

[역사적 배경]

형평사가 조직된 것은 1923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였다. 백정의 인권 쟁취와 자유평등사상 실현 주장이 당시 많은 사람으로부터 공감대를 얻었고, 형평사 조직은 창립 이후 1년 만에 전국적으로 12개 지사와 67개 분사로 확대되었다.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도 1924년 4월 분사가 설치되었다.

[경과]

아산 지역의 형평사 운동을 이끈 사람은 백정 집안 출신으로 1904년 온양면에서 나고 자란 이한용(李漢容)이었다. 1928년 간도(間島) 사립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중퇴한 뒤 아산으로 돌아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형평사 아산분사의 활동도 이때부터 확인된다.

형평사 아산분사는 1928년 2월 18일 온양읍의 형평사 회관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이지영(李址永), 이동환(李東煥) 등이 참여한 가운데 건피장(乾皮場)[가죽 건조장] 수리, 총본부 유지, 재만동포(在滿同抱) 구축 문제, 천시(賤視) 차별 철폐, 사원 교육 등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같은 해 6월 17일에는 형평사 회관을 중수하고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1929년 3월 12일에는 온양읍 온천리에 지부가 설치되었다. 아산과 온양 각각에 별도로 두 개의 조직을 갖출 만큼 활동이 활발하였다. 이한용은 이미 1929년부터 형평사 중앙본부에서 활동하면서 서울과 아산을 연계하는 활동을 벌였다.

1930년대 들어 형평사 운동은 전국적으로 더욱 큰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운동의 성격은 백정의 인권 신장으로부터 민족 독립의 과제에 집중되었다. 특히 형평사 운동은 계급해방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한용도 중앙일보사 아산지국과 사회주의 잡지 『이러타』의 아산지국을 맡으면서 형평사 아산분사를 기반으로 활동을 넓혀갔다.

[결과]

1932년부터 일제 경찰은 형평사 내에 형평청년전위동맹(衡平靑年前衛同盟)이라는 비밀결사가 있다고 판단하고, 형평사 관계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 명목으로 검거하였다. 이한용도 1933년 4월 이 사건으로 검거되면서, 형평사 아산분사의 활동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형평사 아산분사는 일제강점기 아산 지역에서 조직된 사회운동 단체 가운데 적극적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한용을 중심으로 백정의 인권 확보와 신분해방을 제기하고 아산 지역 사회운동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한편, 이를 민족 독립의 과제와 연결시켜 나갔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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