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743
한자 尹致昊
영어공식명칭 Yun Chiho
이칭/별칭 좌옹(佐翁),이토 지코[伊東致昊]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필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5년 1월 23일연표보기 - 윤치호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3년 - 윤치호 충청남도 아산에서 서울 승동으로 이주
활동 시기/일시 1881년 - 윤치호 조사시찰단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 방문
수학 시기/일시 1881년~1883년 - 윤치호 일본 동인사에 입학하여 신학문 공부
수학 시기/일시 1885년~1888년 - 윤치호 중국 상하이 중서학원에서 유학
수학 시기/일시 1888년~1891년 - 윤치호 미국 테네시주 밴더빌트대학 신학과 별과생으로 입학
수학 시기/일시 1891년~1893년 - 윤치호 미국 조지아주 에모리대학에서 인문과 사회 분야 공부
활동 시기/일시 1893년~1895년 - 윤치호 중국 상하이 중서서원 영어 교사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897년 - 윤치호 독립협회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윤치호 경기도 개성에 한영서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11년 - 윤치호 신민회에 참여하다가 105인 사건 주모자로 수감
몰년 시기/일시 1945년 12월 6일연표보기 - 윤치호 사망
출생지 신촌[새말] -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승동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일대
학교|수학지 중서서원 - 중국 상하이
학교|수학지 밴더빌트대학 - 미국 테네시주
학교|수학지 에모리대학 - 미국 조지아주
성격 지식인|관료|사회운동가
성별
본관 해평(海平)
대표 경력 덕원부윤|외부협판|학부협판|독립협회 회장|만민공동회 회장

[정의]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지식인이자 관료.

[개설]

1898년(고종 35) 독립협회(獨立協會) 2대 회장으로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활동하였으며, 1904년(고종 41) 2월 무안감리(務安監理)로 발령받았다가 부임 3개월 전 외부협판(外部協辦)에 임명되었다. 1911년 신민회에 참여하다가 105인 사건 주모자로 체포되어 3년간 수감생활을 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친일 활동을 펼쳤다.

[가계]

윤치호(尹致昊)[1865~1945]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호는 좌옹(佐翁)이다. 1865년(고종 2)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에서 윤웅렬(尹雄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증조할아버지 윤득실(尹得實) 때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 아산군 일동면 후천리[현재 음봉면 동천리]로 이주하였다가 윤득실의 아들 대에 신촌[새말, 현재 둔포면 신항리]으로 이주하였다. 무신 집안으로 활동하며 아산 지역에 세거지를 두고 서울 생활을 병행하였다. 할아버지 윤취동(尹取東) 대부터 부를 축적하여 아산 지역의 부호 집안으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 윤웅렬은 무과에 급제한 이후 1880년(고종 17)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동행하였다. 윤웅렬은 개화파 관료로 활동하였으며 이러한 윤웅렬이 있었기 때문에 윤치호가 신학문을 일찍부터 접할 수 있었다.

[활동 사항]

다섯 살 되던 해부터 장 선생이라는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글공부를 시작하였다. 1873년(고종 10) 충청남도 아산에서 서울 승동[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일대]으로 이주하였다. 1875년(고종 12) 김정언(金正言) 밑에서 수학하였고, 1879년(고종 16)부터 1881년(고종 18)까지 어윤중(魚允中)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어윤중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으로 향했다. 어윤중은 조사시찰단 활동을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하였지만 윤치호는 귀국하지 않고 유학 생활을 하였다.

윤치호는 일본에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여 2년간 중등교육을 받았다. 이때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야노 요시데츠[矢野義徹], 김옥균(金玉均) 등과 교류하였다. 윤치호는 1882년(고종 19)부터 영어를 공부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영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귀국 후에는 개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주사(主事)로 활동하였다. 윤치호는 조선도 근대화를 받아들여 일본처럼 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윤치호김옥균, 서재필(徐載弼), 박영효(朴泳孝) 등 갑신정변의 주역과 함께 어울렸지만, 임금을 반역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정변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 실패의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윤치호는 갑신정변 실패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 윤치호는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사 알렌(Y. J. Allen)이 설립한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하여 공부를 이어 갔다. 윤치호는 1887년(고종 24) 중서서원 교수인 본넬(W. B. Bonnel) 목사에게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입교하고 감리교인으로 세례를 받았다. 1888년(고종 25) 10월 중서서원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남감리회 계통 밴더빌트(Vanderbilt)대학 신학과 별과생으로 입학하였다. 1891년(고종 28) 7월부터는 조지아주에 있는 에모리(Emory)대학에 들어가 인문과 사회 분야를 공부하였다. 윤치호는 미국 유학 중 서광범(徐光範), 서재필 등과 교류하였다.

1893년(고종 30)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중서서원 영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1895년(고종 32) 2차 김홍집 내각이 구성되자 귀국하여 관리로 복귀하였다. 윤치호는 학부참의(學部參議),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비서관(祕書官), 외부협판을 거쳐 학부협판(學部協辦)을 역임하였다. 이후 1896년(고종 33) 민영환(閔泳煥)을 수행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였다가 1년간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였다. 귀국 후에는 독립협회에 적극 가담하여 서재필, 이상재(李商在),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활동하였다.

윤치호는 독립협회 2대 회장이며 독립신문사 사장이자 주필,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회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이후 천안군수(天安郡守)·무안감리 등 지방관과 외부협판을 역임하였고,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強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교육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05년 아버지 윤웅렬의 기부금과 자신의 기탁금으로 개성에 한영서원(韓英書院)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동시에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아산군 음봉면[현 아산시 음봉면]의 보통학교, 송도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에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1910년에는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를 창설하고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1911년 신민회에 참여하다가 105인 사건 주모자로 체포되어 3년간 수감생활을 하였다.

[3·1운동과 윤치호]

윤치호는 석방 후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윤치호는 식민통치를 불가피한 현실로 인식하고 독립보다는 자강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다. 윤치호는 한국인에게는 아직 독립국가를 운영해 나갈 만한 실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독립투쟁보다는 교육과 경제 방면에서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 위에서 3·1운동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 3·1운동이 시작된 후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독립운동 무용론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였다.

윤치호가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윤치호는 일제가 힘을 앞세워 한국을 강제 병합하여 한국인에게 동화를 강요하고, 경제적 수탈과 차별을 일삼고 있는 현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일제의 통치에 의한 한국의 발전은 일본의,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발전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이 지적·경제적 상황을 개선해 일본인과 동등하다는 것을 증명하면 일제가 한국인에게도 동등한 대우와 기회를 부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국인이 실력을 양성한다면 언젠가는 국제 정세 변동에 따라 독립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따라서 윤치호에게 시급한 것은 독립이 아니라 개개인의 인격 수양에 의한 민족성 개조였다.

[아산 지역과의 관계]

윤치호는 충청남도 아산에서 출생하여 서울에 거주하면서도 아산 지역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 왔다. 특히 105인 사건 이후 수시로 아산 지역을 드나들었다. 아산 지역은 할아버지·아버지의 묘소가 있고, 해평윤씨 집안의 토지가 있어 경제적 토대였다. 1911년 아버지 윤웅렬이 사망하고 윤치호가 문중과 선산, 농지를 직접 관리하면서 지역사회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대에는 묘소 관리, 일가친척 만남, 지역 인사와의 교류가 아산 방문의 주요 목적이었고,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성묘와 온천 여행이 주를 이루었다.

[친일 행적]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전까지 윤치호는 독립운동에 반대했지만 적극적인 친일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일전쟁 발발 이후 친일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기독교계 친일을 주도하였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과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등의 고위간부를 지냈다. 이러한 변화는 중일전쟁에 대한 윤치호의 인식 때문이었다. 윤치호는 중일전쟁 발발 이후 국제 정세가 일본 대 서양으로 변하자 황인종 대 백인종의 대결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인종 간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일제가 승리해 백인종의 자만심을 꺾어 주기를 염원하였다. 또한 러시아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주의보다는 일제의 통치가 훨씬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러일전쟁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일제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윤치호는 1940년 6월 이토 지코[伊東致昊]로 창씨개명을 하였으며 일제가 제창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민족 차별 철폐로 보고 긍정적으로 파악하였다. 내선일체가 한국인의 민족성을 해체하고 일본인이 된다는 인식보다는 일본이 다민족 대국가가 되면서 한민족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인정해주리라고 전망했던 것이다.

[저술 및 작품]

1883년(고종 20)에서 1943년까지 60여 년간에 걸쳐 일상생활이나 활동, 국내 정세에 대한 견해와 전망, 직접 겪은 여러 사건의 정황, 민심의 동향, 루머 등이 한문·영어·한글로 기록되어 있는 『윤치호일기』가 대표 저서이다. 이 외에도 『이솝우화』와 프랑스 작가 장 드 라 퐁텐(Jean de La Fontaine)의 우화 등을 번역·재창작한 『우스운 소리』, 1911년 영어 문장 구조를 도해 형식으로 보여 주는 『영어문법첩경』, 『영어문법첩경』의 증보판 성격으로 1928년 출간한 『실용영어문법』 등의 저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걸리버여행기』, 『의회통화규칙』, 『찬미가』 등이 있다.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석곡1리 선영에 있으며 산 중턱 윤취동의 묘 아래 좌측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11년 남작(男爵) 작위를 수여받은 아버지 윤웅렬의 사망으로 작위를 세습했으나, 1913년 105인 사건으로 형이 확정되자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1945년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勅選)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이름이 실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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