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400
한자 由緖-貢稅里聖堂
영어공식명칭 Historical and Beautiful Gongseli Cathedral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한성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0년 - 간양골성당 창설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5년 5월 5일 - 간양골성당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간양골에서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로 이전하면서 공세리성당 창설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8년 7월 28일 - 아산공세리성당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 지정
원 소재지 간양골성당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간양길
현 소재지 아산공세리성당 -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당길 10[공세리 194-1]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 성당.

[성당의 설립]

‘공세리(貢稅里)’라는 이름은 조선의 조운(漕運) 제도와 관련이 깊다. 조운이란 전국 각지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해당 지역 인근의 강변이나 해안에 설치한 창고인 조창(漕倉)에 모아두었다가, 일정한 시기에 선박에 실어 한양의 경창(京倉)으로 운반하는 제도이다. 공세리는 육지가 바다로 볼록하게 튀어나온 지형[곶]으로, 조운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과거에는 성당이 있는 높은 언덕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동쪽에 나루가 있었다. 이러한 곳에 조선 세종 때 공세곶창(貢稅串倉)을 설치하여 세곡을 보관하였고, 중종 때 80칸의 조창을 짓고 ‘공진창(貢津倉)’이라 하였으며, 인조 때 조창을 보호하기 위해 돌로 창성(倉城)을 쌓았다. 하지만 17세기부터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세금을 베[布], 돈(錢)으로 내거나 사선(私船)을 임대하여 직접 경창으로 운반함에 따라 점차 조창의 기능이 약화되다가 19세기 고종 때 결국 조창이 폐지되었다. 지금도 성당 정면 바로 아래 토굴처럼 조성된 ‘성체조배실’의 앞에서부터 아래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성벽과 남문지(南門址)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성벽, 그리고 그 오른쪽에 모아서 세워 놓은 해운판관비(海運判官碑)와 송덕비들을 통해 이곳의 옛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886년(고종 23)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면서 1770년대에 전래되어 100년 동안 박해받던 천주교는 드디어 선교의 자유를 얻었다. 내포의 천주교 공동체는 여러 차례의 모진 박해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그래도 신앙의 뿌리는 뽑히지 않고 굳건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교 조선교구는 내포를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을 재건하고 확장시키기 위해 1890년(고종 27) 내포의 중심지인 예산 고덕 양촌과 교우촌이 있었던 간양골에 성당을 설립하였으며, 코스트 신부[블랑 주교 사망에 따른 임시 조선교구장 역임자]가 퀴를리에(L.Curlier)[레오] 신부와 파스키에(P. Pasquier)[베드로] 신부를 각각 파견하였다. 두 성당은 각각 ‘양촌본당’과 ‘간양골본당’으로 불렸다. 양촌성당의 퀴를리에 신부는 덕산과 홍주 지역을 포함한 충청도의 서쪽과 남쪽 지역을 관할하였고, 간양골성당의 파스키에 신부는 예산과 아산을 포함한 충청도의 북쪽과 경기도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 두 성당에 변화가 생긴 것은 1894년(고종 31)에 일어난 청일전쟁동학농민혁명 때문이었다. 내포에서 일어난 동학군이 두 성당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훼손시킨 사건이 있었는데, 그 전에 퀴를리에와 파스키에 신부는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의 명에 따라 서울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파스키에 신부가 병이 들어 홍콩으로 요양을 떠나는 바람에, 두 개 성당 구역을 모두 퀴를리에 신부가 맡게 되었고, 관할 지역이 너무 넓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던 퀴를리에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이전에 파스키에 신부가 건의했던 대로 간양골성당을 공세리로 옮기자고 건의하여, 1895년(고종 32) 5월 5일 성당 이전이 이루어졌다. 관할 지역은 간양골성당 때와 같았으며, 간양골은 공세리성당의 공소(公所)가 되었다. 공세리는 충청도와 경기도의 경계에 있고 수로 교통이 편리하여 파스키에 신부가 일찍부터 성당 터로 점찍어 둔 곳이었고, 천주교 조선교구에서도 이곳의 지리적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새 성당의 준공과 변천]

초대 공세리성당 주임 신부로 임명된 드비즈(E. Devise)[1871~1933]는 사전에 매입하여 개조한 10칸짜리 기와집 성당 건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2대 주임 신부로 부임한 기낭(Guinand Pierre)[1872~1944]에 이어 1897년(고종 34) 3대 주임 신부로 다시 부임한 드비즈가 먼저 한 일은 조창 폐지 후 폐허가 된 상태에서 북쪽의 침해당(沈海堂)[바닷길의 안녕을 빌던 신당]만 남아 있어 사람들이 귀신 나온다고 두려워하던 조창 터를 매입하여, 1899년(고종 36) 8월에 한옥식 성당을 준공한 일이었다. T자형의 한옥 성당은 기와지붕 위로 기와를 올린 사각형의 종탑이 불쑥 솟아 나온 특이한 형태였고, 성당 옆으로 별도의 기와집 사제관과 사랑채가 양쪽에 일렬로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ㄷ자형의 건물 배치를 하고 있었다. 드비즈 신부는 1930년까지 총 35년간 재임하면서 주변의 토지를 대량 매입하여 신자들에게 싼 소작료로 소작을 주어 신자들의 기본적 경제생활을 돕고 교회의 재정을 튼튼히 하였으며, 고아원을 후원하고 성당 부설 학교를 세우는 등 천주교회의 지역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프랑스에서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은 건축가이자 공예가였던 드비즈 신부는 1920년대에 들어 신자 수가 크게 증가하자, 중국인 벽돌공과 기술자 20여 명을 직접 지휘 감독하여 1922년 9월 자신이 직접 설계한 현대의 고딕 양식의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공사를 시작할 때 드비즈 신부는 성베네딕도 성인의 전구(轉求)를 구하는 3일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완공 당시부터 공세리성당은 주변 자연환경과 어우러지며 풍기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으로 아산 지역의 명물로 자리 잡았으며, 멀리서도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집을 지을 때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얹었던 한국의 전통 방식과는 달리, 기초를 다진 후 사방에 벽부터 쌓는 것도 희한한 구경거리였다. 직접 가마를 만들고 벽돌을 굽기 위해 장작과 모래, 자갈, 석회 등의 골재를 실은 우마차가 계속 오가고, 석공들의 돌 다듬는 소리와 이를 구경하는 구경꾼들로 공세리 마을은 거의 매일 장날처럼 떠들썩했다고 한다. 이렇게 지어진 공세리성당은 대전교구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성당으로, 이후에 지어진 합덕성당[1929년], 예산성당[1934년], 공주 중동성당[1936년] 등 다른 성당의 건축적 모델이 되었다.

1970년에 성당 내부의 기둥을 없애고 북쪽을 개조하여 제대 공간을 좌우로 넓히고, 성당 뒷면 바깥에 피정과 회합을 위한 공간을 덧대어 증축함으로써 성당 전체의 모양이 십자형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개조되어 사용되다가,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사업으로 성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성당을 원형대로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7월에 우선 성당 내부의 기둥을 복원하였다. 이어서 2000년 아산시의 지원을 받아 성당과 옛 사제관의 원형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01년 완전히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그리고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 왼편 부지에 새 사제관, 수녀원, 예수마음 피정의 집을 신축하였고, 성당 바로 아래 언덕 밑에 성체조배실을 각각 신축하는 사업을 병행하여 2002년 10월에 완공하였다. 2003년에는 성당 주변을 한 바퀴 도는 오솔길을 만들었는데, 이 길에는 예수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되었다. 2008년 9월에는 옛 사제관을 개보수하여 공세리성당의 기원과 성전 건축, 드비즈 신부, 조선 후기의 박해와 순교자, 6·25전쟁 때의 박해와 고난 등을 주제로 특화시킨 공세리성지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신앙의 못자리]

흔히 내포 지역을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라고 하는데, 이는 조선 후기 박해 시대에 내포 지역에 살던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서 인근 충청도 지역의 산골로 피신하여 ‘교우촌’을 형성하거나 아예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으로 멀리 피신하여 천주교 신앙을 전파했기 때문에 생겨난 비유이다. 내포에서 박해 시대 때 ‘신앙의 못자리’가 예산 신암 여사울과 당진 합덕 신리였다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는 어디였을까? 바로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 들어선 합덕과 공세리라고 볼 수 있다.

합덕성당에서 예산, 홍성, 서산, 태안 방면으로 천주교회가 확산되어 나갔듯이, 공세리성당에서는 아산, 천안, 공주, 경기도 안성과 평택 방면으로 천주교회가 확산되어 나갔다. 공세리성당에서 1897년(고종 34) 공주성당이 분리되었고, 1900년(고종 37)에 안성성당이 분리되었는데, 1928년 안성성당에서 평택성당, 1939년에는 안성성당에서 천안 오룡동성당이 각각 분리되었다. 1948년에는 공세리성당에서 온양성당이 분리되었고, 그 이후 온양성당에서 아산 지역의 도고, 모산, 온양 용화동 등 나머지 8개 성당이 분리되어 나갔다. 공세리성당 소속이었던 아산 둔포공소는 1965년 성환성당 소속으로 변경되었다가, 1976년에 둔포성당으로 분리되었다.

이렇듯 공세리성당은 2018년까지 23대의 주임 사제를 거치며 오랜 세월 동안 질적·양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동안 10여 명의 사제와 10여 명의 수도자를 배출하였고, 경기도 남부와 충청남도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뿌리를 확고하게 내리고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적 역할을 다하였다. 간혹 성당 밖으로 나가서 천주교 신앙 축제인 ‘성체 거동’ 행사를 열어서 지역의 중심 교회로서 그 위상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아름다운 공세리성당]

공세리성당의 성당과 사제관 건물은 1922년 건립된 이후 지역의 명물로 자리매김하여 내려왔다. 성당 건물 자체가 매우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서 순례객에게 경건하고 신선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성당과 어우러진 오래된 나무들과 자연경관은 속세에 지친 여행자의 마음을 푸근하게 어루만져서 새로운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계절마다 공세리성당이 보여 주는 독특한 아름다움은 마치 설악산에서 사계절마다 펼쳐지는 아름다움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공세리성당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유명해져서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이용되었고, 사진작가들의 필수 출사지가 되었다. 요즘에도 많은 사진작가들이 찾아오고, 주말이면 주차장이 모자라고 마을길이 비좁아질 정도로 전국에서 성지 순례객과 관광객이 몰려든다. 그런데 공세리성당의 진정한 이름다움은 성당의 역사와 구조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때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성당을 향해 언덕길이나 계단을 오르면 수령이 400여 년 가까이 되는 팽나무가 성당 입구에서 순례객을 맞이한다. 이 나무는 성당 사진을 찍을 때 항상 같이 나오는 나무로 ‘문지기’ 나무라고도 불린다. 거기서 바로 성당 계단을 오르지 말고 성당 정면 앞의 작은 정원에서 주변의 경관을 바라보며 공세리의 지형과 조창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면, 옛날에 바닷물이 바로 밑에까지 들어오고 멀리 동쪽으로 보이는 너른 들판이 바닷물이 들락거렸던 너른 갯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성당을 바라보면, 밑에서부터 대칭을 이루며 뾰족한 종탑까지 솟아오른 정면의 모습이 마치 두 손을 겸손하게 모아서 하늘을 향해 정성을 다해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수도자를 연상시킨다.

계단을 올라서 왼편 옆문을 통해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아치형의 하얀 천장과 양쪽으로 줄지어 천장을 떠받들고 있는 돌기둥과 하얀 벽에 난 반원 아치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들, 그리고 갈색의 기도석 등이 어우러져 장엄하면서도 거룩한 분위기에 저절로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성수(聖水)가 놓인 입구에서 가톨릭 신자라면 성수를 찍어 이마에 바르고 세상살이에 찌든 자신을 반성하며 기도석으로 들어가 앉아본다. 그러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어느새 거룩한 곳에서 기도하는 수도자의 마음가짐이 된다.

기도석 앞쪽으로 나아가면 제사 공간이 있다. 이곳은 사제(司祭)와 복사(服事), 독서자(讀書者)만 들어갈 수 있는 성스러운 공간이다. 공세리성당의 제사 공간에는 앞쪽의 제대와 함께 촛대 12개가 장식되어 북쪽 벽에 붙어 있는 오래된 목조 제대가 하나 더 있다. 합덕성당이나 예산성당처럼 역사가 오래된 문화재급 성당에는 이런 제대가 반드시 남아 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미사 때 사용하는 언어를 라틴어에서 각 나라의 모국어로 바꾸고 라틴어 성경도 모국어로 바꾸도록 허용하는 쇄신을 단행하면서, 사제가 신자들을 등지고 벽에 붙은 제대에서 미사를 드리던 전통을 신자들을 마주보며 미사를 드리도록 개혁하였다. 따라서 제대도 사제와 신자들 사이로 위치를 이동한 것이다. 이 두 제대에는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십자군전쟁 때 타 종교를 박해한 것과 유럽의 종교전쟁 때 개신교 교도를 대량 학살한 것, 제2차 세계대전 때 파시즘 세력에 굴복한 과오들을 반성하고 교회가 사회 정의를 이루기 위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확인하고 선포한 역사가 깃들어 있다. 교회 역사에 관심이 있는 순례객이라면 제대를 바라보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기억하고 더듬어보며 묵상하는 것도 신앙의 성숙을 위해 좋은 체험이 될 것이다. 종교가 그 종교의 근본적인 원칙을 지키면서도 역사의 과정을 거치며 변화하고 반성하고 쇄신되어야 한다는 상식을 공세리성당에서 되새겨볼 수 있다.

성당 밖으로 나와서 주변을 빙 도는 오솔길을 걸으면 [가톨릭 신자라면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며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공세리의 독특한 지형과 역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느낄 수 있다. 지금은 북쪽 바로 아래 대로에 자동차들이 소음을 내며 달리고 있지만, 조선 후기에는 바닷물이 철썩거리던 벼랑이 있었다. 오솔길을 한 바퀴 돌아 다시 한 계단 오르면 이 지역 순교자들의 묘가 나온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시대를 뛰어넘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무덤 앞에서는 잠시 사람이라는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순교자들의 묘에서 한 계단 더 올라가면 사제관을 개조해서 만든 공세리성지박물관이 성당 마당 서편에 자리 잡고 있다.

공세리성지박물관의 모양은 공세리성당을 세울 때 같이 지은 사제관의 모습 거의 그대로다. 기와지붕에 유럽풍의 건물로 사제가 생활하는 공간인 2층을 밖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설치한 것이 인상적이다. 같은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성당 건물과 무척 잘 어울린다. 박물관은 아담하면서도 알차게 꾸며져서 공세리성당을 찾은 순례객에게 작은 즐거움과 감동을 준다. 1층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전시물을 보고 안내문을 읽어가다 보면 공세리를 중심으로 한 내포 천주교회의 역사와 수난을 알 수 있고, 이명래 고약이나 조성보통학교, 간척사업 등에 관한 내용을 읽다 보면 공세리성당이 지역에서 선교 사업과 함께 의료와 교육, 경제 사업도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성당의 역사적 의미]

일제강점기에도 공세리성당의 성직자와 신자들은 내포 천주교회의 순교의 역사와 전통을 지키고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신자들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1939년에 부임한 정규랑[레오] 신부는 순교자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순교 사적지에 대한 조사를 통해 현재의 내포 천주교회 성지 개발의 기초를 닦았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공세리 마을의 시계 역할을 하던 성당 종을 공출로 빼앗겼지만, 광복을 염원하는 기도를 드리며 시련을 견뎌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성당 건물이 1950년 6·25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점거당하여 공회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때 8대 주임 신부 뷜토가 북한군에게 납치되어 순교하였다. 조선 후기 순교의 역사가 현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성당 건축물과 자연환경이 빚어내는 아름다움 속에는 이렇듯 한국사의 아픈 상처가 스며들어 있다.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간직했기에 1998년 7월 28일 성당과 옛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2007년 8월에는 박씨 3형제 순교자의 묘가 있던 자리에 순교자 현양탑을 세워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 28위의 유해와 묘석을 봉안하고, 그 위에 도자기 테라코타 부조 작품 ‘28위 순교자’를 설치하였다. 그 후 추가로 발굴된 4위 순교자의 유해 또한 이곳에 모셨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