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427
한자 天主敎
영어공식명칭 Catholic
이칭/별칭 가톨릭교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성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5년 - 간양골성당 이전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활동하는 있는 로마가톨릭교.

[개설]

충청남도 아산시의 천주교는 조선 후기 1890년대에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생적인 노력으로 서울, 경기 지역에 이어 아산 지역을 비롯한 내포 지역에 전래되었다. 이후 천주교가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100년간 모진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를 내면서도 내포 지역에는 천주교 신앙의 뿌리가 확고하게 내렸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1890년대 이후 성당(聖堂)과 공소(公所)가 많이 설립되었다. 충청남도 아산 지역도 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아 1890년에 설립된 예산의 간양골성당을 1895년에 아산 지역으로 옮긴 공세리성당을 시작으로 2011년까지 총 11개의 성당이 설립되어 지역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활동해 왔다.

[천주교의 한국 전래]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조선 후기 정조 임금 때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가 한 명도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 개혁을 추구하던 남인 학자들의 노력으로 받아들여졌다. 1779년부터 경기도 광주의 주어사(走魚寺) 천진암(天眞菴)에서 이승훈(李承薰)·이벽(李檗), 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형제와 정약전·정약종·정약용 형제 등 10여 명이 참여한 강학회(講學會)에서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중국에서 들여온 서학(西學)[처음에는 천주교가 서양의 학문으로 인식되었기에 붙여진 명칭] 관련 서적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종교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1784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 북경으로 간 이승훈은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J. J. de Grammont)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 묵주(黙珠) 등 천주교 성물(聖物)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승훈이 다른 이들에게 세례를 주어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고, 중인(中人) 김범우의 집 명례방[현재 명동성당 자리]에서 정기적으로 신앙 집회가 열렸다. 천주교는 서울에 이어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변천]

천주교를 충청도에 전파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 인물은 예산 여사울[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사람 이존창(李存昌)이다. 이존창은 1785년경 스승 권일신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내포 지역에 전도 활동을 시작하여 양반, 평민은 물론 천민들을 대거 입교시켰다. 그 후 천주교는 이도기·정산필·김풍헌 등의 활동으로 공주·홍성·부여와 전라도 북부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1795년 초에 잠입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1752~1801]에 의해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신분 평등을 설파하고 유교적 제사를 거부한 천주교는 조선 정부로부터 강력한 박해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정약종·이존창·강완숙 등 초기 교회 지도층이 순교하였고, 황사영은 백서(帛書)[비단에 쓴 글]를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정하상 등은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면서 성직자 영입을 위해 로마 교황청에 편지를 보냈고, 그 결과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신부]들이 속속 밀입국하여, 마침내 1831년에 조선교구(朝鮮敎區)가 설정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1866년부터 5년간 계속된 병인박해는 박해의 절정이었다.

박해 시대 신자들은 산골에 신앙 공동체인 교우촌(敎友村)을 만들었으며, 비밀리에 전국을 순회하며 사목(司牧) 방문을 하는 사제로부터 간혹 미사와 성사(聖事)를 받았다. 조선 후기 천주교 신도들은 성리학적 관념을 타파하고 신분 평등을 지향함으로써 사회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한글 전용 교리서와 천주가사(天主歌詞)를 보급하여 서민 문화 발달에 기여하였다. 천주교는 개항 후인 1886년 한불수호조약을 맺으면서 공식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1877년 9월 제6대 조선교구장 리델 주교와 함께 황해도를 통해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 두세(C. Doucet)[한국명 정가미(丁加彌)] 신부는 1883년, 1884년에 걸쳐 충청도의 천안·아산·예산·홍주·당진·서산·공주·부여·논산·서천과 경기도의 안성·평택 등을 순회하며 모두 35개의 교우촌을 공소로 설정하였다. 1890년 8월에 퀴를리에 신부는 예산 양촌[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양촌 본당을, 파스키에 신부는 예산 간양골[현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에 간양골 본당을 설립하였다.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내포에 거세게 번지자, 퀴를리에 신부와 파스키에 신부는 일단 서울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파스키에 신부가 병이 깊어져 홍콩으로 요양하러 가게 되어, 잠시 퀴를리에 신부가 관할하던 간양골 본당은 1895년에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로 옮겨졌다.

[현황]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공세리성당은 오랫동안 지역의 많은 천주교 공소들을 거느리는 중심 역할을 했다. 1948년에 온양성당이 분리되었으며, 이후 도고성당[1974], 둔포성당[1976], 온양 용화동성당[1985], 모산성당[1985], 온양 신정동성당[2004], 배방성당[2008], 장재성당[2010], 온양 모종동성당[2011], 온양 풍기성당[2011]이 분리 설립되었다.

[의의]

충청남도 아산 지역은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내포 천주교회의 순교 신앙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아 신앙의 뿌리가 깊고 신자들의 신앙심이 깊은 곳이며, 성당과 신자도 많다. 아산 지역의 천주교는 성직자와 수도자를 많이 배출하는 등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확고한 위상을 갖춘 교회로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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