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238
한자 祭禮
영어공식명칭 Ancestral Ritual Formalities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효경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지역에서 돌아가신 부모나 윗대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 의례.

[개설]

사람이 사망하면 후손들이 조상을 기리기 위해 망자의 기일(忌日)을 비롯해 설이나 추석 등의 명절(名節)에 집안이나 묘소에서 제사를 지낸다. 조상을 위해 베푸는 제사는 각 가정과 문중이 단위가 된다. 설에는 떡국을, 추석에는 송편을 절식으로 마련해 차례(茶禮)를 지낸다. 다른 제사와 달리 차례에는 축문은 읽지 않고 단잔(單盞)을 올린다. 사당이 있는 집에서는 사당제사를 먼저 올리고 각 가정별로 차례를 모시는데, 사당제사에는 문중 사람들이 참례한다. 각 문중이나 집안에서는 음력 10월에 길일을 가려 묘소에서 시제(時祭)를 지낸다. 5대조 이상 조상의 묘소에서 윗대 조상부터 차례대로 후손들이 모여 함께 제사를 지낸다.

[차례(茶禮)]

충청남도 아산시 주민들은 대표적인 명절인 설과 추석에는 종손과 장남 가정에서 차례를 지낸다. 다른 지역과 달리 아산시에서는 정월 보름에는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차례는 기제사와 마찬가지로 방 안에서 모시는 4대조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동족촌이라면 먼저 종가에 모여서 윗대 조상께 차례를 지낸다. 참례자가 많으면 남자만 참례하고, 여자는 집 안에서 손님 접대를 준비한다. 종가에서 차례를 마치면 식사를 하고 항렬 순으로 각 가정을 돌며 해당 집안의 조상을 위하는 차례를 모신다.

차례 제물은 집안마다 차이가 있다. 설에는 떡국을 올리고, 추석에는 송편을 올리지만 기제사처럼 메와 국만을 올린다. 메와 국을 올리는 집안에서는 반드시 김, 조기 등의 제물을 올린다. 메와 국을 올리지 않으면 김·조기 등을 올리지 않고, 단잔(單盞)을 올린다. 차례를 마친 후에는 성묘(省墓)한다.

무남독녀는 친정부모를 위해 건넌방에서 차례를 지내기도 하는데, 그나마 시댁의 배려가 없으면 차례를 지낼 수 없다. 처갓집 차례는 사위와 외손자가 참례한다. 아산시에서는 조상 차례를 지낼 때 방 안의 성주에게는 별도로 상을 올리지 않는다.

[기제사(忌祭祀)]

장손 집에서는 고조부터 부모까지 기일마다 제사를 지낸다. 기제(忌祭)에는 형제들이 자손을 데리고 큰집에 참례한다. 지차(之次)[맏이 이외의 자식들]는 제물로 올릴 고기, 술 등을 마련해 가며 빈손으로는 가지 않는다. 기제일은 사망 전날 저녁을 기준으로 새벽닭이 울기 전인 자시(子時)에 지낸다. 남편의 기제사에 부인을 합사로 모신다.

집안에 위중한 환자가 있거나 초상이 생기면 기제사는 지내지 않는다. 후손의 사망일이 조상의 기일과 겹치면 후손의 탈상 때까지 윗대 조상의 제사는 지내지 않는다.

제사를 앞둔 후손은 부정을 가리기 위해 상가(喪家)나 산가(産家)를 왕래하지 않는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조상 제사를 지내고 훗날 조문한다. 제삿날에는 조상의 혼령이 집 안으로 들어오다가 줄에 걸린다 하여 마당의 빨랫줄도 모두 거둔다. 제물은 집집마다 다른데, 과일은 사과·배·감·대추를 기본으로 한다. 복숭아는 귀신을 쫓는다고 하여 올리지 않으며, 개고기는 사용하지 않고, 어물 중에서는 ‘치’ 자가 들어간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 나물을 무칠 때도 고춧가루를 넣지 않는다.

제주(祭主)는 제상을 안방의 아랫목에 놓고, 지방(紙榜)을 붙이고 제물을 진설한다. 제일 앞줄에는 과일과 조과(造菓)를 놓는데, 과일은 홍동백서(紅東白西)로 놓는다. 두 번째 줄에는 조기·김·나물·포·식혜를 놓는데, 조기와 포는 홀수로 올리므로 한 마리나 세 마리를 올린다. 식혜는 밥알만 올리며, 나물은 열의 중앙에 놓는다. 탕은 단탕(單湯)으로 올리며, 적(炙)은 세 종류를 놓는다.

자손들이 모두 자리하면 먼저 촛불을 밝히며, 모사(茅沙) 그릇에는 잡곡을 담고 그 위에 강신주를 붓는다. 장손이 초헌(初獻)하고, 기제사 축문을 읽지만 최근에는 축문을 생략하는 가정이 많아졌다. 지차들이 아헌(亞獻)-종헌(終獻)을 한다. 조상이 제물을 편히 운감(殞感)[제사 때 차려 놓은 음식을 귀신이 맛봄]하라는 뜻에서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방 밖으로 나간다[합문(闔門)]. 20분 정도 후에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갱물을 올리고 메를 한 수저씩 떠 넣고, 철상(撤床)한다. 그런 후 자손들이 제물을 내려 음복(飮福)한다. 이때 제상에 올렸던 갱물을 마시면 무서움을 타지 않는다고 하여 아이들에게 한 모금씩 마시도록 준다. 조상이 운감한 제물이므로 갱물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김해김씨(金海金氏) 묘제(墓祭)]

문중별로 음력 시월에 길일을 택해 시제를 모신다. 묘소에서 지낸다 하여 ‘묘제’라 부른다. 영인면 백석포리에는 김해김씨 안경공파의 자손들이 약 40호 정도 거주한다.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 중시조 금령군의 7세손인 영정(永貞) 옹이다. 마을 뒷산에 족분(族墳)이 있으나 재실은 별도로 없다. 2000년대 초반에 종회를 거쳐서 입향조의 묘소를 제외하고, 자손들의 묘소는 봉안당에 모셨다. 선산에 제단을 만들고 그곳에서 시제를 지낸다. 해마다 음력 10월 보름에 제단에서 시제를 지내는데 보통 30여 명의 자손이 참석한다.

제사가 간소화되어 홀기(笏記)[제례 때에 의식의 순서를 적은 글]는 읽지 않으며 축문(祝文)만 준비한다. 자손이 모이면 당일에 헌관(獻官)을 뽑는다. 초헌은 종손이 맡고, 아헌과 종헌은 모인 이들 중 항렬이 높은 사람이 맡는다. 첨작(添酌)은 초헌관이 맡지만 근래에는 하고 싶은 사람이 한다.

오전 10시쯤 종가에 모인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선산으로 향한다. 두 곳에서 제사를 모시기 때문에 제물도 두 몫을 마련한다. 제물은 지게를 사용해 선산까지 가지고 간다. 자손들은 먼저 입향조의 묘소에서 시제를 모시고, 제단으로 향한다. 가장 앞 열에는 홍동백서(紅東白西)로 과일을 놓고, 그다음 줄에는 숙채[익힌 나물]와 조기 한 마리를 진설하고, 식혜는 밥알만 떠서 제상의 우편에 놓는다. 적으로는 소고기 산적과 숭어를 올린다. 편은 제기에 높이 고임으로 담고, 북어포 한 종류를 올린다. 시제에는 메와 갱을 올리지 않으므로 숟가락도 놓지 않는다. 20명의 조상을 합사하므로 조상 수에 맞추어서 잔과 젓가락만 놓는다.

제사는 기제사와 같은 순서로 지낸다. 다만 ‘방안제사’가 아니므로 합문 절차는 생략한다. 초헌, 아헌, 종헌을 하고 곧바로 첨작한다. 시제를 마친 후에는 음복을 하면서 종중 일을 상의한다.

[신창맹씨(新昌孟氏) 묘제]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신창맹씨(新昌孟氏) 집성촌에는 신창공, 사직공, 호군공, 개북공 네 개 계파의 자손들이 거주한다. 해마다 양력 10월 10일에 맹사성 고택의 뒤편에 위치한 사당에서 차례를 지낸다. 이 사당은 정면 삼 칸의 건물로 ‘세덕사(世德祀)’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맹사성[문정공], 맹유[상서공], 맹희도[동포공]의 위패가 있다. 사당 차례는 음력 10월에 지내야 하지만, 자손이 모이가 어려우므로 종중 회의를 통해 양력 10월 10일로 변경했다. 사당 차례를 지낸 후에는 각 파별로 시제를 모신다.

현 주민은 맹사성의 23대 후손들로, 사당 차례를 지내는 날에는 각지에서 온 500여 명의 자손들이 참례한다. 제물 준비는 관리인이 맡지만 종중에서 일정 제비를 지급한다. 오전에 위패를 함에서 꺼내 놓고 그 앞에 제물을 진설한다. 맹사성이 생식을 즐겼다고 하여 밤, 대추, 호두, 사과, 배 등을 모두 껍질을 깎지 않고 올리며, 고기도 모두 생것을 올린다. 메를 대신해 기장을 생것으로 놓는다. 세덕사에서 10월에 차례를 지내고, 맹사성의 묘제는 음력 10월에 경기도 광주의 묘소에서 별도로 지낸다.

중리 마을 뒤쪽에 자리한 산은 신창맹씨 호군공파의 선산이다. 호군공의 묘소 역시 광주에 있으며, 자손들의 묘가 이곳에 있다. 중리에서 약 30리가량[약 12㎞] 떨어진 송악면 동화리 배골에는 호군공의 직계 손자인 별제공의 묘소와 그 직계 자손의 묘소가 있다. 17대조의 묘소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데, ‘조상들 머리 위로는 올라가지 않는다’라고 하여 후손의 묘소는 조상보다 높은 곳에 쓰지 않는다.

음력 10월 7일에는 17대조 별제공의 시제를 지낸다. 별제공의 묘소에 딸린 위토가 많아 산지기를 두어 관리하고, 산지기가 제물을 마련한다. 2000년대 초반에 재실을 다시 지었다. 재실은 제물을 마련하는 공간이지만 비가 와서 묘소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면 제사 공간으로 사용한다.

종회는 회장, 총무, 총무 이사, 유사로 구분해 종중의 여러 일을 맡아 운영한다. 묘소의 벌초는 유사가 날을 택해 자손에게 통보한다. 자손 중에서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한다. 후손들은 묘제를 앞두고 초상집에 가지 않고, 당일에는 목욕재계를 하고 참례한다. 만약 시제를 지낼 무렵에 집안에서 초상이 나면 시제에 참석하지 않는다. 제사 3일 이전에 재실에서 제물을 마련한다. 전날에 떡을 찌는데, 켜켜이 팥고물을 넣어 찐다. 떡이나 적 위에 달걀노른자를 부쳐서 장식하고 고기도 잘게 썰어서 고명으로 올린다. 제기에 제물을 고이는 것은 남자의 몫이다. 제물은 높이 고일수록 좋다고 한다. 밤은 육각으로 쳐서 고이고, 대추는 뜨거운 물에 불려서 손으로 모양을 잡아 고인다. 고임질을 하기에 힘든 제물은 잣과 은행으로, 목기의 중앙에 백지에 쌀을 넣은 것을 놓고 은행에 밥풀을 붙여서 쌀 주머니에 붙인다. 사과, 배, 곶감은 쓰러지지 않게 고정한다.

별제공의 묘소에서 시제를 지낸 후 파별로 나누어서 각기 시제를 지낸다. 시제를 지내기 전에는 산신제를 지낸다. 별제공 묘소보다 약간 위쪽에 단이 있어 이곳에서 모신다. 산신은 산의 주인이므로 조상보다 앞서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산신께는 주과포(酒果脯)를 올리고, 단잔(單盞)을 붓는다. 시제 당일에는 곳곳에서 100여 명 정도의 자손이 찾아온다. 초헌관은 종손이 하고, 아헌관과 종헌관은 참석한 자손들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맡는다.

제물 진설은 과일은 홍동백서로 놓고, 좌포우혜(左脯右醯)라고 하여 좌측에는 항상 포를 놓고, 우측에는 식혜를 놓는다. 포는 북어, 문어포를 쓴다. 어동육서(魚東肉西)라 하여 동쪽에 어류를 놓고, 서쪽에는 육고기를 놓는다. 탕은 별제공 시제에만 오탕(五湯)을 올리고, 나머지 조상에게는 삼탕(三湯)을 올린다. 적은 계적(鷄炙), 어적(魚炙), 육적(肉炙)으로 삼적을 올린다.

본래 헌관은 세 명을 뽑지만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단잔을 올리고, 아헌과 종헌은 첨작한다. 여러 묘소를 다녀야 하므로 저녁 늦도록 제사가 이어진다. 식사는 제사 후 매번 간단하게 음복(飮福)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시제를 마치고 자손들이 돌아갈 때는 산지기가 제물을 조금씩 싸서 건넨다.

[후손 없는 이에 대한 제사]

개발로 없어진 충청남도 아산시 탕정면 갈산리 2리 여술마을에서는 후손을 두지 못하고 사망한 분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홀아비 황씨, 엄씨와 안씨 내외로 모두 다섯 명을 위한 공동 제사이다. 황씨가 사망하면서 밭 500평을 기탁했는데, 그 자리에 선문대학교가 들어서면서 보상을 받아 그 돈 일부로 마을회관을 짓고, 나머지는 마을 기금으로 보관 중이다. 안씨 내외가 남긴 땅은 팔아서 마을회관 부지를 매입했다. 이처럼 사망 후 그들이 희사한 재산을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

제사는 절기상 한식(寒食)에 지내며, 모든 주민이 나서서 제사 준비를 한다. 제사 주관은 동계장이 맡고, 헌관은 나이가 많은 노인이 맡는다. 제사는 묘소에서 지낸다. 밥, 탕, 삼색실과, 시루떡 등을 마련하며, 주민들이 음복하기 위해 돼지 다리를 구입한다. 본래는 각기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지냈지만, 지금은 묘소 가운데에 제물을 올리고 합사한다.

[참고문헌]
  • 이필영 외, 「아산시의 평생의례」-제례(『한국인의 평생의례』-충청남도편, 국립무형문화재연구소, 2007)
  • 이필영 외, 「민속」(『아산평택 택지개발 사업지구 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 충청문화재연구원·대한주택공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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