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976
한자 忠臣李鳳祥旌閭
영어공식명칭 Chungsin Lee Bong-sang Jeongnyeo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여송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28년 3월 15일연표보기 - 충신 이봉상 명정이 내려짐
현 소재지 충신 이봉상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산57-1 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익공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5칸
측면 칸수 1칸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아산 이충무공 유허 경내에 있는 충신 이봉상의 조선 후기 정려.

[개설]

이봉상(李鳳祥)[1676~1728]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의숙(儀叔)이며,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으로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서 출생하였다. 1702년(숙종 28) 무과에 급제한 후 1711년(숙종 37)에는 금군장(禁軍將)에서 승지(承旨)에 오르게 되었고, 경종이 즉위하면서 포도대장(捕盜大將),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이 되었다. 그 후 1722년(경종 2)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三道水軍統制使 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으며, 1725년(경종 5)에는 총융사(摠戎使)를 역임하였다. 한편 영조가 즉위한 이후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1725년(영조 1)에는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훈련금위대장을 겸임하였다. 이때 소론의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 등의 죄상을 논박하였는데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자 어영대장에서 좌천되어 충청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켜 청주가 함락되었는데, 충청병사인 이봉상을 도와 적에 맞서 싸웠던 숙부 이홍무(李弘茂)[1665~1728]와 함께 반란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그 당시 충청감영에 들어온 이인좌가 이봉상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였지만 충무가(忠武家)의 충의(忠義)를 내세워 끝내 굽히지 않고 순국하였다. 그 직후 호서어사 이도겸(李道謙)이 청주로부터 돌아와 이봉상의 순절을 전하자, 1728년(영조 4) 3월 15일 영조는 충신 정려를 명하고 충민(忠愍)의 시호를 내렸으며 좌찬성에 추증하였다. 1731년(영조 7)에 청주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이봉상과 영장 남연년(南延年), 비장 홍림(洪霖) 등 3충신을 제향하도록 하였다.

[위치]

충신 이봉상 정려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사적 제155호 아산 이충무공 유허 경내에 있다. 입구를 거쳐 충무문을 지나면 약 70m 앞 오른쪽에 충신 이봉상 정려가 있다.

[형태]

정려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익공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기와는 청기와를 얹었다. 화강석 기단 위에 팔각 장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으며 벽면은 사방 모두 홍살로 꾸며졌다. 좌우 측면에 방풍판을 설치하였으며, 정려의 목재 부분은 채색 단청이 이루어져 있다. 현충사에 있는 정려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충신 정려를 시작으로 이순신의 조카 이완(李莞)의 충신 정려, 5대손 이봉상(李鳳祥)과 4대손 이홍무(李弘茂)의 충신 정려, 8대손 이제빈(李悌彬)의 효자 정려가 차례로 내려져 그 명정 현판이 각 칸마다 한가운데에 걸려 있다. 다섯 개의 현판 모두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명정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충신 이봉상 정려는 정려각을 바라보며 정면 오른쪽에서 두 번째 칸에 명정 현판이 걸려 있다. 명정 현판에는 ‘충신 증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훈련원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행가선대부충청도병마절도사 시충민공이봉상지려 영묘무신사월일명정(忠臣贈崇錄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訓鍊院事五衛都總府都總管行嘉善大夫忠淸道兵馬節度使諡忠愍公李鳳祥之閭 英廟戊申四月日命旌)’이라 쓰여 있다.

[의의와 평가]

충신 이봉상 정려가 있는 현충사 정려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이순신의 후손 4명, 이른바 4충신(忠臣) 1효자(孝子)의 명정 현판이 함께 걸려 있어서 매우 의미가 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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