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802
한자 尹潽善
영어공식명칭 Yun Boseon
이칭/별칭 해위(海葦)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홍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 8월 26일연표보기 - 윤보선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6년 - 윤보선 한성고등소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10년 4월 - 윤보선 한성고등소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10년 5월 - 윤보선 경성부 일출소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12년 4월 - 윤보선 경성부 일출소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13년~1915년 - 윤보선 일본 도쿄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 중퇴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윤보선 신한청년당 입당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윤보선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 역임
수학 시기/일시 1921년 - 윤보선 영국 우드브룩 대학, 스칼리시 학교, 옥스포드 대학 등에서 수학
수학 시기/일시 1925년 - 윤보선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 전공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30년 12월 - 윤보선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 전공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5년 9월 - 윤보선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0월 - 윤보선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 행정자문위원, 금융경제위원회 고문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윤보선 한국민주당 중앙집행위원장 및 서울시당 위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7년 4월 - 윤보선 『민중일보』 사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윤보선 이승만환국기념사업회 대표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윤보선 우남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윤보선 한영협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8년 - 윤보선 제헌국회 국회의장 비서실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8년 12월 15일~1949년 6월 5일 - 윤보선 서울특별시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9년 3월 12일~1950년 2월 24일 - 윤보선 대한축구협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9년 6월 6일~1950년 5월 9일 - 윤보선 상공부 장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0년 11월~1952년 7월 18일 - 윤보선 대한적십자사 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윤보선 상이군인신생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윤보선 민주국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4년 5월 10일~1958년 - 윤보선 제3대 국회의원[서울 종로갑, 민주국민당]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5년 9월 18일 - 윤보선 민주당 중앙위원, 중앙당 의원부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5년 11월 - 윤보선 민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6년 - 윤보선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8년 5월 31일~1960년 7월 28일 - 윤보선 제4대 국회의원[서울 종로갑, 민주당]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0년 7월 29일~1961년 5월 16일 - 윤보선 제5대 국회의원[서울 종로갑, 민주당] 역임
추모 시기/일시 1960년 8월 12일 - 윤보선 무궁화대훈장 서훈
활동 시기/일시 1960년 8월 12일연표보기~1962년 3월 22일연표보기 - 윤보선 제4대 대통령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3년 - 윤보선 제5대 대통령 후보[민정당] 출마
활동 시기/일시 1963년 12월 17일~1967년 6월 30일 - 윤보선 제6대 국회의원[전국구, 민정당]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6년 - 윤보선 신한당 총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7년 - 윤보선 제6대 대통령 후보[신민당] 출마
활동 시기/일시 1971년 - 윤보선 국민당 총재 역임
추모 시기/일시 1984년 3월 20일 - 윤보선 인촌문화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86년 - 윤보선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89년 - 윤보선 석오이동녕기념사업회장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90년 7월 18일연표보기 - 윤보선 사망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해위길52번길 29[신항리 143-1]지도보기
묘소 윤보선 전대통령 묘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산 28-2 지도보기
성격 정치인
성별
본관 해평(海平)
대표 경력 제4대 대통령

[정의]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가계]

윤보선(尹潽善)[1897~1990]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호는 해위(海葦)이다.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이자 1920~1930년대 민족 운동에 참여했던 윤치소(尹致昭)와 중추원 의관이었던 이재룡의 장녀 이범숙(李範淑)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안성, 남포군수, 강계부사, 대한제국 육군 참모장 등을 역임한 윤영렬(尹英烈)[1854~1939]이며, 종조할아버지[할아버지의 남자 형제]는 병조판서, 군부대신, 법부대신, 전라남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윤웅렬(尹雄烈)[1840~1911]이다. 작은아버지는 대한민국 초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윤치영(尹致暎)[1898~1996]이다. 아버지의 사촌 형제[당숙]인 윤치호(尹致昊)[1865~1945]는 개화파로 한성부판윤, 독립신문사 사장 등을 지내고,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윤보선은 1897년 8월 26일 충청남도 아산군 모산면 신촌[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등 일가가 중앙 관직에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10세에 한성으로 올라와 지금의 안국동에 있는 안동장에서 생활하며 한성고등소학교[지금의 교동초등학교]와 일출소학교를 다녔다. 1913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다녔으나 1915년 학업을 접고, 국내로 돌아왔다.

1910년대 초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사회진화론에 반감을 품어 자연스레 반일 감정도 생겼다고 하며, 오히려 신해혁명에 대한 관심으로 여운형 등과 교류하게 되었다. 이에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준비했고 신학 공부를 한다고 집안에 알린 뒤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고, 1919년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최연소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또한 고향에 도움을 요청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운영자금을 받았다.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주선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1925년 에든버러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1930년 12월 졸업하였다. 그리고 유럽 여러 지역을 여행한 후 1932년 국내로 돌아왔다. 귀국 후 일제 경찰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어 간간이 교회를 다니거나 함경도 안변의 문중 별장에 가는 것을 빼고는 거의 집에서 지냈다. 그러면서도 고향의 신항리교회에 헌금하여 교회를 개축하게 하였고, 학교에 토지를 기부하고 언론에 기고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광복 직후 이인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 봉영회’ 준비에 앞장섰다. 미군정 때에는 농상국 고문, 행정자문위원 등의 역할을 맡았다. 1946년 독립촉성국민회에 참여하는 한편,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가 송환될 때 서울역에서 유해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민중일보 사장을 맡으면서 남조선 과도정부의 고문 역할도 하였다. 영국 유학 경력을 기반으로 한영협회의 회장이 되었고, 이승만기념사업회의 회장으로서 이승만 일대기 집필은 물론 단정(單政) 수립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1948년 5·10총선거에 충청남도 아산군 지역구에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고, 이승만이 국회의장 비서실장직을 맡겼으나 두 달도 안 되어 사직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서울특별시장과 상공부 장관을 지내며 청렴한 공직 생활의 모범이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사적인 인사 요구 등에 반감을 품으면서 거리가 멀어졌고, 결국에는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사임 직후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낙선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 부산으로 피난한 후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냈다. 전쟁 중에 이승만의 정치적 행동에 반감을 품어 야당인 민주국민당에 참여하였고, 1954년 치러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종로갑 선거구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되자 참여하여 자유당의 부패에 항의하는 여러 활동을 펼쳤으며,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었다.

1960년 3·15부정선거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당이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내각을 구성하면서 제4대 대통령이 되었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대통령직을 맡으면서 대통령 집무 공간의 명칭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꾸었다. 의원내각제에서는 국가 운영의 실권이 국무총리에게 있고, 민주당은 신구 갈등이 빚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5·16군사정변을 일으켰는데, 국가 원수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대통령직을 놓지 않았으나 결국 군부와의 갈등으로 1962년 3월 22일 하야를 발표하고 물러났다.

이후 1963년 7월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2월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한일협정에 반대하고, 야권 세력을 하나로 모아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1967년 또 한 번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는 등 정권에 대항하는 활동을 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에는 원로 정치인으로서 정책 자문 역할을 하였다.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 의장, 석오이동녕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맡아 활동하였고, 1990년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윤보선의 저술로는 1967년 회고록 형태로 발간한 『구국의 가시밭길-나의 회고록』[한국정경사]이 있으며, 사망한 후인 1991년 『윤보선 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동아일보사]이 발간되었다. 제3대 국회의원 시절에는 「농립업 진흥의 긴급성에 관하여」[1954]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묘소]

윤보선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해평윤씨의 일가 묘역에 있다. 생존 당시 "독재자와 함께 누울 수 없다"며 국립묘지 안장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윤보선은 1960년 8월 12일 대통령에 취임하며 무궁화대훈장을 받았다. 1984년 3월 20일에는 인촌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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