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548
한자 排芳山城
영어공식명칭 Baebangsanseong Fortress
이칭/별칭 복부성(伏釜城),복부성(伏俯城),배방산성(排方山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신흥리|공수리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서정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5월 17일 - 복부성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45호 지정
문화재 해지 일시 1988년 8월 30일 - 복부성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45호 해제
문화재 지정 일시 1988년 8월 30일연표보기 - 배방산성 충청남도 기념물 제67호 재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배방산성 충청남도 기념물 재지정
현 소재지 배방산성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신흥리|공수리지도보기
성격 산성
양식 테뫼식 석축 산성
관련 인물 왕건|유금필
크기(높이,길이,둘레) 1,500m[둘레]
면적 95,108㎡
소유자 온양방씨
관리자 아산시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신흥리공수리에 걸쳐 있는 고려 전기의 석축 산성.

[개설]

배방산성은 솥을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겼다 하여 ‘복부성(伏釜城)’이라고도 하며,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신흥리 산19번지공수리 산49번지 일대의 성재산[250m]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다. 배방산성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축성하였다는 설과 함께 455년(개로왕 원년) 때 누나 성배(成排)와 남동생 성방(成芳) 쌍둥이 남매의 재주 겨루기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남매 간의 겨루기에서 성배가 성방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하여 ‘복부성(伏俯城)’이라고도 한다.

[건립 경위]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성곽조(城郭條)에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313척[약 1,000m]에 높이는 13척[약 4m]이며, 안에 우물 두 개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적조(古跡條)에 "고려 태조가 유금필(庾黔弼)에게 명하여 탕정군(湯井郡)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에 근거하여 일반적으로 배방산성은 고려 초에 유금필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탕정군에 쌓았다는 성이 반드시 배방산성이라는 뚜렷한 근거는 없으며, 인근의 성안말산성이나 읍내동산성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유금필이 쌓은 성이 배방산성이라면 배방산성은 고려 태조 왕건의 명을 받은 유금필이 견훤(甄萱)의 후백제 세력이 차령산맥 이북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축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위치]

남리육교 근처의 순천향로에서 남쪽으로 갈라지는 신흥길을 따라 600m쯤 간 뒤 왼쪽의 배방읍 신흥리 감택[감태기]마을을 거쳐 동쪽의 배방산성으로 올라간다. 성재산 동쪽의 공수1리마을회관 앞을 지나 올라갈 수도 있다. 성재산은 배방산[361m]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진 산줄기의 1㎞ 지점에 솟아 있는 산이며, 산성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배방산성은 북쪽의 곡교천 일대는 물론이고, 동쪽과 서쪽으로 모두 전망이 매우 좋아 군사 요충지로서 산성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서쪽의 읍내동산성성안말산성, 북쪽으로 백암리산성, 동쪽의 세교리산성 등 여러 산성과 연계 활동이 가능한 위치이다.

[형태]

배방산성은 성재산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어 테뫼식 석축 산성이지만 둘레가 1,500m나 될 만큼 규모가 크기 때문에 작은 계곡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의 형태도 갖추었다. 성벽의 축조 방식은 성문 주변만 안팎으로 벽면을 맞춰 쌓은 협축식(夾築式)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바깥쪽 면만 돌을 맞춰 쌓은 편축식(片築式) 기법이다. 납작하고 길쭉한 성돌(城-)을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축조하였고, 성벽의 안쪽은 잡석으로 뒤채움하였다. 바른층쌓기 방식은 돌의 각 단마다 수평 줄눈이 일직선이 되도록 쌓는 것을 말한다.

길이 20m가량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는 남벽의 경우 외벽의 높이가 7~8m나 되는데 돌을 40단 정도 쌓아 올린 것이다. 성재산은 정상부가 뾰족하지 않고 거의 ‘일(一)’ 자에 가까울 정도로 평평한 형태여서 성안은 매우 넓다. 성과 관련된 부대시설로는 북문과 서문의 문터, 창고 등 여러 건물터, 우물터 등이 있다. 북문은 서로 방향을 약간 어긋나게 설치한 어긋문 형태로 추정된다.

[현황]

배방산성의 성벽 대부분은 이미 완전히 붕괴된 상태이며, 극히 일부만 남아 있다. 근래에는 성안에 고압선 철탑을 세우는 공사를 진행하며 서벽 일부를 허물었다. 1988년 8월 3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67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배방산성은 아산 지역에 남아 있는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비록 대부분 무너지기는 하였지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구간에서 축성법을 비교적 잘 살펴볼 수 있는 산성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는 고려 초에 축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성벽의 축조에 사용된 성돌을 보면 통일신라 때 축성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백제 건국 초에 쌓은 탕정성(湯井城)과의 관계도 확인되어야 하며, 성배와 성방 쌍둥이 남매의 전설이 백제가 한성(漢城)을 빼앗기는 개로왕 때의 일이라는 점도 상징성이 있다고 본다.

1757년(영조 33)부터 1765년(영조 41) 사이에 편찬된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에는 ‘폐성(廢城)’이라고 기록하였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폐지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도 배방산성은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본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3,313척, 『여지도서』에는 1,700척[약 515m]이라 하여 규모의 차이가 배 가까이 나는데, 배방산성의 실제 규모도 정확히 조사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배방산성에 대한 발굴 조사와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산성의 실체와 의미를 밝히는 과정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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