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포 양민 학살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436
한자 屯浦良民虐殺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홍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51년 1월 4일 - 1·4후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1년 1월 18일연표보기 - 둔포 양민 학살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51년 1월 18일연표보기 - 둔포 양민 학살사건 종결
발생|시작 장소 둔포면사무소 -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둔포리 461번지 지도보기
종결 장소 둔포면사무소 -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둔포리 461번지 지도보기
성격 사건

[정의]

1951년 1월 18일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둔포리[현 아산시 둔포면 둔포리]에 머무르던 피난민들이 미군기의 무차별 폭격에 희생당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50년 11월 말, 중공군이 6·25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UN군 병력은 남쪽으로 후퇴를 시작하였다. 12월 24일 흥남부두에서 마지막 철수 선박이 병력과 피난민을 태우고 떠났으며, 이듬해인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마저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의 연합 병력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인들 역시 중공군을 피해 남쪽으로 다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경과]

1950년 1월 18일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사무소 소재지인 둔포리에는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의 남침을 피해 피난민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1월의 혹독한 추위를 피하여 둔포면사무소의 한 창고와 그 옆의 민가 등에서 밤을 보내기로 하였다. 피난민들은 창고 주변에서 모닥불을 지피며 온기를 느끼고 있었는데 갑자기 미군기가 날아와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곳에 폭탄 두 발을 투하하고 지나갔다. 이로 인해 둔포면사무소에 있던 피난민 중 약 300명이 무참히 희생되었으며, 생존자는 17명 정도로 파악되었다. 생존자 등의 증언에 의하면, 이 폭격은 사전에 알리지 않고 실행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주변에서 작전 수행중이었던 미군 제25사단 27연대는 보급로 확보를 위하여 사전에 피난민에 대한 통제를 사단 본부에 요청했다고 하며 둔포를 경기도 군포로 오인하여 폭격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결과]

피난에서 돌아온 마을 주민들과 관공서 직원, 의용소방대원들은 희생당한 시신들을 수습하였다. 당시 생존자와 관공서 직원 등의 증언에 의하면 260여 구의 시신은 둔포와 평택의 경계에 있던 노성교 주변의 강둑에 묻었다고 하며, 약 60구를 당시 둔포파출소 사이렌 탑 주변에 묻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희생자의 대부분은 피난민이었기 때문에 둔포 양민 학살사건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비밀유지 기간이 지난 미군의 문서에서 둔포 양민 학살사건에 대한 기록이 나오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둔포 양민 학살사건의 기록이 밝혀지면서 무고한 양민들의 피해를 미군이 알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사과 등 후속조치가 없어 논란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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