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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철기시대 유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447
한자 初期鐵器時代遺跡
영어공식명칭 Remains in Early Iron Ag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선사/철기
집필자 서정석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에 철기 문화가 새롭게 유입된 초기 단계의 각종 유적.

[개설]

초기철기시대라는 용어는 한국 고고학에서만 사용되는 시대 구분 용어로, 청동기시대를 뒤이어 새롭게 철기 문화가 유입된 초기 단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철기가 새로이 유입되었을 때에는 청동기 문화가 한창 발달해 있을 때인 만큼 청동기시대 후기를 포함하여 기원전 300년경부터 기원 전후[또는 기원전 100년경]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기는 철기시대이기는 하지만 중국 연(燕)나라의 영향으로 주조(鑄造)[녹인 쇠붙이를 거푸집에 부어 물건을 만듦] 철기가 보급되는 단계로, 이후 중국의 단조(鍛造)[금속을 두들기거나 눌러서 필요한 형체로 만드는 일] 철기가 대량으로 보급되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와는 구별된다. 이 시기는 철기시대로 접어든 초기라고는 하지만 이전의 청동기 문화도 지속적으로 유지될 뿐만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는 청동기 문화가 오히려 더 발전하기도 하는데, 충청남도 아산 지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산의 초기철기시대]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초기철기시대 유적으로는 신창 남성리 돌널무덤, 염치읍 백암리유적, 선장면 궁평리유적, 배방면 장재리유적 등을 들 수 있다. 초기철기시대가 되면 무덤과 주거지가 그 이전의 청동기시대와 달라지는 변화를 보이는데, 아산 지역에서 발견된 유적은 대부분이 무덤이다. 초기철기시대 무덤의 경우 청동기시대 내내 지속되던 고인돌은 소멸되고 새로이 돌무지돌덧널무덤[적석석곽묘(積石石槨墓)] 혹은 돌무지나무널무덤[적석목관묘(積石木棺墓)]이라고 할 수 있는 묘제가 등장한다. 이 묘제는 구덩이[토광(土壙)]를 파고 그 안에 나무로 짠 관을 안치할 때 그 주위 공간이나 상부에 돌을 끼워 넣거나 쌓아 두어 돌돌림무덤[위석묘(圍石墓)]이라고 하는데, 한반도에서는 대전광역시 서구 괴정동,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남성리,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에서 발견된 것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들은 지하로 구덩이를 깊이 파고 나무로 짠 관을 안치한 다음, 그 주위와 상부에 토기와 청동기, 철기 등을 같이 묻었다.

아산 지역의 초기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은 신창 남성리 돌널무덤인데, 1976년 국립박물관에서 조사할 당시 유적은 이미 크게 파괴되어 있어 정확한 구조는 알기 어려웠지만 돌로 쌓은 벽면이 남아 있어 흔히 남성리 석관묘[또는 아산 남성리 유적]라고 부르고 있다. 좁은놋단검[세형동검(細形銅劍)] 9점, 방패 모양의 청동기[방패형동기(防牌形銅器)] 1점, 대쪽 모양의 청동기[검파형동기(劍把形銅器)] 3점, 거친무늬거울[다뉴조문경[多紐粗文鏡]] 2점, 부채 모양 청동도끼[선형동부(扇形銅斧)] 1점, 청동끌[동착(銅鑿)] 1점, 천하석제(天河石製) 곱은옥[곡옥(曲玉), 옥으로 만든 장신구의 일종] 1점, 대롱옥[관옥(管玉), 구멍을 뚫은 짧은 대롱 모양의 구슬] 103점, 덧띠토기[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3개체분, 검은간토기[흑도장경호(黑陶長頸壺)] 1개체분, 칠기(漆器)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선장면 궁평리유적에서도 좁은놋단검 1점, 청동꺾창[동과(銅戈)] 1점, 어깨달린구리도끼[유견동부(有肩銅斧)] 1점, 잔무늬거울[다뉴정문경(多紐精文鏡)] 1점 등이 출토되었다. 궁평리유적은 대체로 기원전 2세기 전반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이라고는 하지만 화려한 청동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비단 아산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대전광역시 서구 괴정동유적이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유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유적이 대체로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출현하고, 아울러 이러한 유적에서 출토되는 이형(異形) 청동기가 중국 요령성(遼寧省) 심양시(瀋陽市) 정가와자유적(鄭家窪子遺蹟)에서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아산만과 금강 유역이 이 시기에 새로운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요동 지역과 아산만 및 금강 유역은 바다를 통해 교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철기시대의 주거지는 청동기시대의 가늘고 긴 형태[세장방형(細長方形)] 주거지에서 직사각형[장방형(長方形)] 주거지로 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산 지역에서의 초기철기시대 주거지의 양상은 분명하지 않다. 초기철기시대 유적 대부분이 무덤 유적이고, 주거지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2017년 배방읍 장재리유적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주거지가 조사된 만큼 앞으로 아산 지역 초기철기시대 주거지의 양상도 전모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한반도의 초기철기시대는 청동기시대를 지나 새로이 철기시대로 진입하였음을 뜻하지만, 초기에는 대동강 이남 지역에서는 오히려 좁은놋단검 등의 청동기 문화가 나름대로 더욱 세련되게 발전한 시기이다. 아산 지역 역시 이러한 일반적인 상황과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신창 남성리 돌널무덤이나 궁평리유적 단계를 지나 기원 전후[또는 기원전 100년경]부터 기원후 300년까지에 해당하는 원삼국시대에 들어서야만 본격적인 철기의 생산과 사용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9.28 내용수정 돌무지돌덧널무덤[적석석관묘(積石石槨墓)] → 돌무지돌덧널무덤[적석석곽묘(積石石槨墓)]으로 오탈자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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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지돌덧널무덤[적석석관묘(積石石槨墓)] → 돌무지돌덧널무덤[적석석곽묘(積石石槨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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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에 따라 내용수정을 완료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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