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581
한자 神井碑
이칭/별칭 주필신정비(駐蹕神井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1동 온천대로 1459[온양1동 242-10]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민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476년 3월연표보기 - 신정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5월 17일연표보기 - 신정비 충남문화재자료 제229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신정비 충남문화재자료 재지정
현 소재지 신정비 -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59[온양1동 242-10]지도보기
성격
양식 비좌규수
관련 인물 세조|정희왕후
재질 대리석|화강석
크기(높이,너비,두께) 56.5㎝[높이]|38㎝[너비]|12㎝[두께]
관리자 온양관광호텔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1동 온양행궁 자리에 있는 조선 전기 세조의 온행 관련 비.

[건립 경위]

1468년(세조 14) 2월 세조는 속리산 복천암(福泉庵)에서 혜각존자(慧覺尊者)를 만나고 1468년 3월 초에 온양행궁에 행차하여 머무르게 되었다. 온양에 온 지 4일째에 신비로운 샘[神泉]이 마당 가운데에서 솟았는데, 그 물은 차갑기가 눈과 같고 맑은 것은 거울과 같았다. 이에 세조는 ‘주필신정(駐蹕神井)’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비를 세우게 하였으며, 임원준(任元濬)이 기문(記文)을 지어 비를 세웠다.

이후 1476년(성종 7) 세조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다시 온양을 찾았을 때 우물은 고치지 않았고, 우물과 비석에 새긴 글씨는 무뎌져서 다시 새기게 했다. 이러한 사실을 임원준이 비석의 뒷면 음기로 기록하고 이숙함(李琡諴)이 써서 1476년 3월에 건립했다. 이 신정비(神井碑)[주필신정비] 건립을 담당한 것은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 등이다.

[위치]

신정비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59[온천동 242-10번지] 온양관광호텔 안에 있다. 온양온천역에서 서쪽으로 400m 정도의 거리이다. 신정비는 또 하나의 온양행궁 관련 유적인 북동쪽의 영괴대와 80m 정도 떨어져 있다. 신정비의 원래 위치는 정문 쪽에 더 가까운 위치인 정문 북서쪽 30m 정도 지점이었다. 신정비가 옮겨진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형태]

신정비는 네모난 화강석 비석 받침[비좌] 위에 비신이 올려진 비좌규수 형태이다. 대리석 재질의 비신은 상단 좌우가 모를 죽인 규형(圭形)으로 앞뒤에 기문이 새겨져 있다. 비석 상단부의 마모가 심해 비문 판독이 어려운 글자가 많다. 완전한 비문은 1796년 정조 때 편찬한 『온궁사실(溫宮事實)』의 「온궁신정사적(溫宮神井事蹟)」에 수록되어 있다. 「온궁신정사적」의 비문은 그동안 알려진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1919년]의 내용과 다른 부분이 많아서 수정이 필요하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56.5㎝, 너비 38㎝, 두께 12㎝이며,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29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금석문]

『온궁사실(溫宮事實)』의 「온궁신정사적(溫宮神井事蹟)」[1796]과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및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의 내용이 서로 달라 검토할 필요가 있다.

1. 「온궁신정사적(溫宮神井事蹟)」

天順八年春二月 我主上承天體道烈文英武殿下南巡狩于忠淸道幸俗離山福泉寺 見慧覺尊者越三月初吉 駐蹕于溫郡之溫陽旣四日神泉忽湧流于庭 上大異之 命鑿之迸然溢出其冷如雪其淸如鑑其味甘而淑其性柔而嬾 天顔悅豫卽命頒示扈從宰樞莫不相顧動色以謂昔無而今有湯溫而泉冽允爲上瑞八道抗表稱賀乃 賜名駐蹕神井焉

嘉善大夫中樞院副使行忠武衛上護軍臣任元濬謹記

(裏面)

昔我世祖惠莊大王之南巡也我 慈聖大王大妃實同幸焉旣 駐蹕溫泉時有神井之瑞遂 賜名勒石以垂不朽越今年春二月 慈聖同兩 王大妃駕幸溫泉則神井不改而石刻缺刓於是感今思古悲不自勝乃以內需財幤購工重刻而 命月山大君臣婷德源君臣曙河城府院君臣鄭顯祖主其事以臣元濬甞記是井仍 命誌其陰 嗚呼臣尙誌之哉臣綴蕪詞己廿星霜慟 龍髯之莫攀悲人事之易變犬馬餘生所欠一死耳今又叅扈從獲叨是 命非幸也天也無任隕越感愴之至敢揮涕淚手以誌顚末云

成化十二年三月日

純誠明亮佐理功臣崇政大夫西河君兼五衛都總府都摠管任元濬誌

折衝將軍行虎賁衛上護軍臣李淑瑊書

2.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및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天順八年春二月日 我世祖大王南巡狩于忠淸道幸俗離山福泉寺見慧覺尊者越三月初吉 駐蹕溫泉郡之溫陽旣四日神泉忽湧流于庭 上大異之命鑿之迸然溢出其冷如雪其淸如鑑其味甘而淑其性柔而嬾 天顔悅豫卽命頒示于 扈從宰樞莫不相顧動色以爲昔無而今有湯溫而泉冷允爲上瑞八道抗表稱賀

嘉善大夫中樞院副使行忠武衛上護軍臣任元濬謹記

(裏面)

世祖大王十四年南巡也我 慈聖大王大妃實同幸焉卽 駐蹕溫泉時有神井之瑞遂 賜命勒碑以垂不朽越明年春二月 慈聖大妃駕幸溫泉則神井不改而石刻缺刓於是感今思古悲不自勝乃以內需財幤遘工重刻而 命月山大君臣婷德源君臣曙河城府院君臣鄭顯祉主其事以臣元濬甞記是井乃命誌其陰 嗚呼臣尙誌之哉臣綴蕪辭巳廿星霜慟龍髯之莫攀▨人事之易變犬馬餘生所欠一死耳今又叅 扈從獲從獲叨是命非幸也天也無任隕越感愴之至敢揮涕淚拜手以誌顚末云

成化十二年三月日

純誠明亮佐理功臣崇政大夫西河君兼五衛都總府都摠管任元濬誌

折衝將軍行虎賁衛上護軍臣李淑瑊書

[현황]

온양행궁은 1904년에 일제 자본가에 의해 강탈되어 온양관이라는 여관으로 전락하며 건물이 대부분 훼손되었다. 1927년에 서양식 건물의 신정관으로 바뀌었고, 6·25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초 미군기의 폭격으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지만, 영괴대비와 함께 신정비는 온전히 전해졌다. 이후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신정비온양행궁과 세조의 온행 사실을 직접적으로 전해주는 1차 사료이다. 특히 행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겪으면서 행궁 자리에 오직 두 가지만 남아 있는 유적 중 하나로서 온양행궁의 영욕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아산 지역에 널리 쓰이는 ‘신정’이라는 지명 등 여러 명칭의 뜻깊은 유래가 되는 비석이다. 이러한 신정비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잘 보전하고 널리 알려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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