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580
한자 靈槐臺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1동 온천대로 1459[온양1동 242-1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민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95년연표보기 - 영괴대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5월 17일연표보기 - 영괴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28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영괴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현 소재지 영괴대 -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1동 온천대로 1459[온천동 242-10번지]지도보기
성격 누정
양식 겹처마 이익공
관련 인물 사도세자[장헌세자]|정조
크기(높이,너비,두께) 약 1m[높이]|약 4m[너비]|약 5m[길이]
관리자 온양관광호텔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1동에 있는 조선 후기 사도세자와 관련된 유적.

[건립 경위]

1760년(영조 36) 사도세자가 다리 부종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행궁(溫陽行宮)에 와 머물면서 활쏘기를 했는데, 그늘이 없어서 온양군수 윤염(尹琰)에게 사대(射臺)에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게 하였다. 그 뒤 사도세자 회갑년인 1795년(정조 19)에 정조가 명하여 그 주변을 정비하게 하였다. 온양군수 변위진(卞緯鎭)이 충청도관찰사 이형원(李亨元)에게 공사비를 지원받아 대(臺)를 조성하였고 공사 후 이형원이 장계를 올리며 대의 이름을 ‘영괴대(靈槐臺)’라 하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정조가 기쁘게 받아들이고 ‘영괴대’라 직접 글씨를 써주고 영괴대명(靈槐臺銘)을 지어 비를 세우게 하였다.

영괴대비 뒷면의 ‘어제영괴대명(御製靈槐臺銘)’과 음기(陰記)는 윤염의 아들 윤행임(尹行恁)이 쓰게 하였다. 비는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藍浦)에서 채취한 오석(烏石)으로 조성하였고, 영괴대에서 아홉 걸음 떨어진 위치에 세웠다.

영괴대 조성과 영괴대비 건립 관련 내용은 『온궁사실(溫宮事實)』[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에 정리되어 있다. 『온궁사실』에는 비석 건립과 영괴대 증축에 든 비용 및 담당 인물들의 명칭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가치가 매우 높다. 비신은 남포장교(藍浦將校) 이인상(李寅祥), 비석 받침돌과 지붕돌로 쓰인 화강석은 온양장교 방호성(方好成)의 지휘로 채석되었다. 어필을 모사(模寫)한 사자관(寫字官)은 이명예(李命藝), 석수(石手)는 남포 장인 윤시문(尹時文) 등 16명이며, 글씨를 새긴 것은 각수(刻手) 이원흥(李元興) 등 5명이다. 글씨에는 전홍(塡紅), 즉 붉은색을 채워 넣었는데 이것은 화사(畵師) 변광욱(卞光郁)이 담당하였다.

[위치]

영괴대영괴대비온양행궁이 있던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1동온양관광호텔 안에 있다. 온양온천역에서 서쪽으로 약 400m 지점이다.

[형태]

영괴대는 품(品) 자형으로 심은 세 그루의 느티나무 주변을 2단으로 흙을 돋워 만든 직사각형의 대이며, 둘레에 돌을 둘렀다. 규격은 길이 15척[약 5m], 너비 12척 5촌[약 4m], 높이 3척 1촌[약 1m]으로 비좌개석의 형태이다.

영괴대비는 화강석 장대석을 2단으로 쌓은 기단 위에 있는 비각 내부에 세워져 있다. 두 장의 넓은 지대석 위에 네모난 비석받침[비좌]이 있으며, 비신[몸돌]은 남포 오석으로 제작되었다. 지붕돌[개석]은 비석 받침과 마찬가지로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비신의 앞면에는 해서체로 ‘영괴대(靈槐臺)’라는 정조 어필이 크게 조각되어 있으며, 오른쪽 상단에 전서체로 작게 ‘어필(御筆)’이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정조가 지은 ‘어제영괴대명(御製靈槐臺銘)’이 조각되어 있으며, 작은 글씨로 음기가 새겨져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03㎝, 너비 45㎝, 두께 23.5㎝이다.

[현황]

영괴대가 조성되었던 온양행궁은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된 뒤 일본인에 의해 강탈되어 온양관이라는 여관 겸 대중목욕탕으로 전락하였으며, 1927년에는 신정관으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온양철도호텔로 바뀌었으나 1950년 6·25전쟁 초기에 미군기의 폭격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후 다시 신축되어 온양관광호텔로 바뀌었다. 그 과정을 겪으며 온양행궁의 유적으로 신정비[주필신정비(駐蹕神井碑)]와 영괴대비만 남게 되었다. 영괴대비는 비각 안에 온전하게 서 있다.

영괴대에 사도세자가 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는 고사하여 한 그루의 둥치만 남아 있는데, 담쟁이 덩굴이 뒤덮은 모습이다. 나머지 현존하는 느티나무는 곁가지가 자랐거나 후대에 심은 것이며, 주변에는 최근에 조경을 위해 소나무를 심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조경을 위해 신창에서 옮겨왔다는 석탑과 석불이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영괴대에는 별도의 돌담이 둘러져 있으며 호텔 건물이 바로 인접해 있다. 영괴대 공간은 호텔 측에서 전통혼례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영괴대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괴대의 유래부터 영괴대비 건립 과정 등은 『온궁사실』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경상북도 예천군에 있는 사도세자 태실 유적, 수원의 융릉·용주사와 함께 극히 적게 남아 있는 사도세자 관련 유적이다. 또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과 추모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어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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